지난 초여름 무렵 충남 부여의 궁남지 연꽃밭을 다녀왔다. 드넓은 들판에 해마다 연꽃이 구름처럼 피어나 장관을 이루는 곳. 마침 부여문화원 초청으로 부여의 명승지를 돌면서 관광객들에게 노상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둘러본 곳이 바로 그 궁남지 연꽃밭이었다. 궁남지 연꽃밭은 여전히 푸르고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초여름 햇빛 아래 가지가지의 연꽃들이 피어 있었고 또 우아한 모습의 연잎들이 자라 있었다. 그런데 의아한 일은 어떤 연꽃밭은 연 이파리만 우북하게 자라 있을 뿐 연꽃이 한 송이도 피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의 물음에 답해준 사람은 그날 안내 역을 맡아준 부여문화원 김인권 사무국장이었다. “그것은 말입니다. 연을 옮겨 심어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연은 새로 자란 뿌리에서만 꽃을 피우는데 저렇게 이파리만 자란 연들은 오래된 뿌리가 바닥에 꽉 엉켜 있어서 새로운 뿌리가 자랄 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렇게 단순한 것을 내가 이제껏 모르고 살았구나. 나무나 풀들도 보면 새롭게 싹이 터서 자란 가지나 줄기에서 잎이 나오고 꽃이 피어나도록 돼 있다. 그건 동물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젊은 생명체에서만 새로운 생명체가 생겨나게 돼 있다.
나는 그때 우리 풀꽃문학관 화단에 심은 아이리스가 왜 해가 갈수록 꽃 피우는 게 시원치 않은지 그 까닭을 알게 됐다. 처음 몇 해는 아주 많은 꽃대를 내밀며 화단의 주인인 양 자태를 뽐내던 아이리스였다. 그런데 근년 들어 꽃 피우는 게 정말로 시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이리스 역시 묵은 뿌리가 서로 엉켜서 그렇고 새로운 뿌리가 자랄 공간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가깝고도 쉬운 일 하나를 깨닫고 알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아니 처음부터 눈감고 사는 어리석음이 있다. 내년에 봄이 오면 아이리스의 묵은 뿌리를 캐내어 새로운 땅에 넓게 심어줘야지. 그때, 그렇게 마음먹었음은 물론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이 더 많이 있을 수 있다. 옛 성인들의 말씀도 그렇다. 우리가 아는 대로 부처님은 우리에게 ‘자비심’을 가지라고 가르치셨다. 다른 생명체를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이 바로 자비심이다. 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쉬운 가르침인가. 예수님은 또 세 가지의 삶을 우리에게 권하셨다. ‘감사’와 ‘기쁨’과 ‘기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말로는 쉬운데 그것을 깨닫고 우리 것으로 하기가 어렵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인류의 스승 공자님은 어떠신가? 공자님이 우리에게 권유하신 삶의 태도는 ‘충서(忠恕)’이다. 충(忠)은 자기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서(恕)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염려하고 용서하는 마음이다. 그 두 가지가 없을 때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황폐해진다. 이 너무나 쉽고도 단순한 진리를 우리가 몰라서 오늘날 이토록 허덕이며 어지럽게 사는 것이다.
문제는 아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삶으로 옮기는 것, 실천이다. 언제나 몸과 마음이 따로 도는 데에 문제가 있다. 공자님은 충서의 실천강령으로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을 또 말씀하셨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게 하지 마라. 이것을 어길 때 갑질이 나오고 미투가 나오고 타인인지감수성(他人認知感受性)이 또 문제점으로 이야기된다.
하지만 그 쉽고도 가까운 말을 알기만 했지 삶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로 문제다. 삶의 진리, 인생의 요체는 멀리에 있지 않고 가까이 있고 어렵게 있지 않고 아주 쉽게 있다. 진정 그 가깝고도 쉬운 것을 찾아서 우리 것으로 하고 우리가 살아내야 한다. 너무나도 쉽고도 단순해서 어려운 것이 우리의 인생, 삶인가 한다.
나태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