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2014년 10월 29일 오전 9시40분 박근혜 대통령이 새해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았다. 차에서 내린 박 대통령은 박형준 당시 국회 사무총장의 안내로 레드카펫 위를 걸어 국회 본청에 들어섰다. 레드카펫의 좌우 양쪽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로 인의 장벽이 세워졌다. 그 뒤에 자리한 노란 옷 입은 이들은 “대통령님, 여기 좀 봐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절규했다. 차에서 내려 본청에 들어서기까지 약 13초, 박 대통령은 끝내 세월호 유가족과 마주하지 않았다. 그날의 상황을 한 언론은 ‘그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지금은 중진이 된 한 야당 의원은 2017년 대선 국면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그렇게 간절하게 자신을 부르는데, 눈길 한번 안 주는 모습이 충격이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를 뽑았던 많은 국민은 국모로서, 일종의 모성애를 기대했을 텐데, 그 기대가 완전히 깨져버린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때 국민 여론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제때 파악했다면 정권의 끝이 이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 정부는 자신 있다고 장담하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11월 19일 임기 반환점을 맞아 진행한 ‘국민과의 대화’에서 “현재 방법으로 부동산 가격을 잡지 못하면 보다 강력한 여러 방안을 계속 강구해서라도 반드시 잡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아파트 단지 25평(83㎡)은 2년 전보다 약 2억원 오른 상태로 거래됐다. 대통령은 자신 있다고 했지만, 다시 2년 반이 지난 5월, 이 단지의 같은 평형 아파트는 문 대통령 취임 당시보다 5억여원 오른 가격에 실거래가 이뤄졌다.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에서도 규제 중심의 주택 정책으로는 집값을 잡기 어렵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자신 있다”였다.
문 대통령은 대선을 한 달 앞둔 지난 2월 10일 외신 인터뷰에서 “주택 공급의 대규모 확대를 더 일찍 서둘렀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지만 이미 시간은 많이 흐른 뒤였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부동산 문제에 대해 한 번만, 국민 마음에 와닿을 정도로 사과했다면 적어도 1%는 돌아오지 않았을까. 많이 아쉽다”고 했다.
윤석열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 보름이 지났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곳에서 이상신호가 감지된다.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기준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두 달이 안 돼 ‘데드 크로스’를 이루더니 최근엔 30%대 지지율마저 위협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4일 출근길 도어스테핑에서 “(지지율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라며 “유념치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들렸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국 경찰서장 회의를 주도했던 류삼영 총경이 대기발령 조치된 것을 두고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여권에서는 ‘배부른 밥투정’ ‘쿠데타’ ‘전 정권의 충견’과 같은 거친 말들이 정제 없이 쏟아진다. 누군가는 이 말에 통쾌함을 느낄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굉장한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민주당의 ‘검수완박법’ 강행 처리에 적지 않은 국민이 싸늘한 시선을 보낸 것은 국민을 충분히 설득하지 않고 ‘나만 옳다’는 식으로 밀어붙인 민주당의 태도 때문이었다. 새 정부와 여당도 원칙이라는 명분 아래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커지고 있는 이상신호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최승욱 정치부 차장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