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세테리스 파리부스와 반지성

입력 2022-07-26 04:03

떼쓰기를 막는 데는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가 유효하다. ‘다른 모든 게 동일하다면’을 뜻하는 라틴어로 일찍이 키케로가 언급했고 19세기에 마샬이 경제학에 도입했다. 이 비교의 전제조건을 깨면 반지성이 고개를 든다. 가상적 예다. 한 부촌 고교들의 졸업생 수능(백점 만점) 평균이 주변보다 7점 높았다. “빈곤이 교육 격차로까지! 7점 줄이기가 공정”이라 지도자가 선언한다. 이어 저소득 지역에는 가점을 주는 정책을 참모들이 도입한다. 옳은 진단일까? 격차의 다른 원인을 무시한 견강부회다. 결과에 대한 직접 개입도 무모하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잦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생계와 고용을 안정시키겠다며 2021년 도입한 ‘경기도 공정수당’ 발표 자료에선 시급 차이를 크게 강조했다. 정규직 시급과 “무려 7000원 임금 격차가 납니다”라고 형광색 표시까지 돼 있었다. 자료 제목부터 ‘7000원은 불합리한 차별’이라 못 박았다. 지난 대선 때 한 후보는 한참 더 나갔다.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이 더 많은 보수를 받는 게 당연하므로 이 격차 줄이기가 공정”이라 단언했다.

아니다. 그건 두 뭉텅이 평균만 내세운 억지다. 도청만 봐도 고위급들은 주로 정규직이고 비정규직 다수는 단순 업무를 본다. 경력, 직종, 업체 규모 등 임금 차이의 유력 원인이 허다하다. 물론 이런 이질성이 일절 없다면 외려 비정규직 프리미엄도 가능하다. “동일 직무의 정규직보다 얼마 더 드리면 비정규직으로 오실래요?” 하는 식의 협상 때문이다. 고용 불안의 감수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두 그룹 간 세테리스 파리부스는 깨지므로 ‘7000원의 불합리한 차별’은 섣부른 단정이다.

나아가 그 후보는 경기도 실험 성과의 전국 확대를 공약했다. 실험의 실체가 뭔가. 작년 말 기준 세금 23억원으로 공공기관 3000명에게 평균 70만원씩 나눠줬다. 전별금 성격의 이전소득이다. 물론 수급자에겐 도움이 되겠으나 노동시장 기능의 측면에서도 유익한 성과가 있었을까. 가령 그들의 고용이 안정됐나? 비정규직 일자리에 대한 불만족이 줄었나? 생산성은? 긍정 효과들을 보며 격차 해소를 위한 자발적 움직임이 촉발됐나? 이처럼 소위 ‘정책 순기능’에 대한 정밀 검증은 보이지 않는다.

800만명을 넘어가는 비정규직 근로자를 돌봐야 한다. 그러나 이런 수당 방식에는 재원 마련, 도덕적 해이 방지, 순기능 검증 등 풀어야 할 난제가 숱하다. 격차를 직접 메꾸려는 처방도 참 거칠다. 그래서 새 노동정책팀의 진짜 실력을 기대한다. 이미 충분히 쌓은 빅데이터로 부문별 불합리한 격차부터 정밀 산정하고 투명하게 공개하자. 그래야 정공법이 나온다. 해외 다수 국가에 이 제도가 있다는 주장도 검토 대상이다. 한편 항구적 개선 차원에서 정규직 시장 내 고용 근로 임금의 유연화가 필수다. 일자리를 흔들고 조각 내는 규제를 바로잡아야 정규직 수요가 늘고 양쪽 격차도 줄지 않겠나.

세테리스 파리부스의 훼손 유형은 두 가지다. 첫째는 갈라치기다. 특히 진영, 지역, 젠더로 쪼갠다. 앞 수능 점수 사례에서 재력도 격차 원인 중 하나라면 그 효과를 줄이는 인프라 제공이 정부 책무다. 둘째 유형은 허투루 비교다. 처한 상황과 제도가 상이해 특정 숫자가 주는 함의가 사뭇 다른데도 남과 단순 비교해버리는 꼼수다. 국가채무 비율, 고용률, 재생에너지 비율 등 비일비재했다. 두 유형 모두 반지성을 촉발했다. 근데 요즘 새 정부 인사들의 언사들을 보다가 “비교할 걸 해야지”란 혼잣말이 다시 튀어나온다. 비교 대상이나 잣대가 갈수록 뜨악해서다. 보신주의와 휴브리스(자만) 가랑비에 옷 흠뻑 젖는다.

김일중(성균관대 교수·경제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