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참의원선거 지원 유세 중 총격으로 사망했다. 선거는 야당 분열로 인해 자민당을 위협할 수 있는 경쟁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민당 승리가 예상된 가운데 아베 전 총리 사망으로 추모 분위기가 더해져 자민당 압승으로 끝났다.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의 영수이며, 퇴임 후에도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아베 전 총리는 연속 재직일수 2822일, 통산 재직일수 3188일을 기록한 최장 재임 총리로 일본 역사에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아베 전 총리에 대한 평가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반드시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일본 정부가 오는 9월 27일에 국장(國葬)을 하기로 결정했지만, 국장에 대한 비판 여론이 존재한다는 게 이를 상징한다. 경제나 외교 분야에 있어서도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한국의 새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아베 전 총리 사망 후 주한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으며, 박진 외교부 장관이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에게 윤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미온적이다. 그 이유는 아베 전 총리의 유산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유산이란 아베 전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노동자 문제와 관련해 구축한 ‘인식 틀’을 말한다.
아베 전 총리는 ‘일본군 위안부 합의’ 이후에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죄 편지를 보내는 것을 거부했으며, 위안부와 관련된 “공적인 자료가 없다”는 정치적 언급을 반복했다. 반면 위안부 합의를 파기한 한국에 대해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국가라는 정치적 발언을 되풀이하면서 한국이 문제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최근 한·일 관계 최대 현안이 된 강제징용 노동자에 대한 배상 문제에 있어서도 2019년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품목의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일본이 수출 절차 간소화 혜택을 인정하는 ‘백색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국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ISOMIA) 파기로 대응했다. 역사 문제가 경제 안보 문제로까지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아베 전 총리는 한국이 국가 간 합의나 협정, 국제법을 지키지 않는 국가라는 발언을 반복했다. 이런 지속적인 발언이 자민당 의원이나 보수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됐다. 그 결과 일본인들에게 한·일 관계 악화는 국가 간 약속과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는 한국에 책임이 있다는 인식 틀을 제공했고, 그 틀은 정치가와 언론 및 일본인 사이에 고착화돼 갔다.
이런 인식 틀이 아베 정권기의 한·일 관계를 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한·일 관계 개선은 이 인식 틀의 극복에서 시작돼야 한다. 이 극복은 어느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일 양국 정부가 서로 노력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아베 전 총리가 구축한 인식 틀에는 전쟁 책임이나 역사 인식, 인권 존중, 피해자 구제라는 관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의 관계 개선 접근에 진지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한국 정부는 파벌 리더로서, 보수 이데올로기의 대표자로서 퇴임 후에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아베 전 총리가 사망했다고 기시다 총리가 바로 한·일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는 정치적 리스크가 크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여유를 갖고 일본 정국의 향방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아베 전 총리가 남긴 부정적 유산을 극복할 수 있는 첩경이라 생각한다.
이상훈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