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7일 개봉하는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용장(勇將)보다는 지장(智將)으로서 조용한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포효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드러날 듯 말 듯하지만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준다. 홀로 생각에 잠긴 모습, 잠 못 이루는 얼굴이 강조된다.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21일 영화 속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 박해일을 만났다. 박해일은 “김한민 감독이 배역을 제안하면서 ‘최민식 선배 같은 용맹스러운 명장의 느낌이 아니다’라고 하셔서 마음이 편해졌다”며 “젊은 지략가로서 수군들과 함께 승리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다. 김 감독은 붓도 잘 어울리는, 군자의 면모를 가진 무인을 부각하려 했다”고 말했다.
촬영장에서 가진 부담감도 털어놨다. 박해일은 “숨이 멈춰졌다. 2만평 규모의 야외 세트에서 장루(배 상부의 전투를 지휘하는 공간)에 올라가면 모든 게 잘 보이는데 스태프와 배우들, 카메라, 심지어 지나가는 주민들도 저를 보고 있었다”며 “전 국민이 아는 위인을 거기서 연기한다고 하니 서 있는 것조차 힘들고 이유 없이 부끄러운 기분이었다”고 떠올렸다.
박해일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 이어 이번에도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헤어질 결심’에선 깔끔하고 예의 바른 형사, ‘한산’에선 침착하고 조용한 장군이다. 감독들은 정형에서 벗어난 연기를 그에게 맡겼고, 전문가들은 호평했다.
박해일은 “관객이 좋게 봐주신다면 제가 때를 잘 만난 것”이라며 태없이 말했다. 그는 “과거였다면 ‘헤어질 결심’의 형사 캐릭터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이순신 장군 역시 드라마, 영화에서 1960년대부터 다뤄졌지만 시대마다 이미지가 다르다”며 “강력한 카리스마도 중요하지만 주변을 아우르는 태도를 가진, 두뇌 플레이에 능한 이순신이 지금 시대에는 어울린다. 어릴 때 장군감 소리도 못 들어봤는데 이순신 장군을 연기했다”며 웃었다.
침착하고 과묵한 캐릭터여서 주인공인데도 대사가 많지 않다. 그래서 전투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발포하라”는 대사가 과거 어느 장군의 명령보다 울림이 크다.
박해일은 “감정을 담은 눈빛, 호흡, 가만히 서있는 것조차도 대사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응하기 쉽지 않았지만 기존과 결이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며 “도인, 선비, 군자 같은 인물로 그렸기에 한 번 말할 때 강하게, 깊게, 넓게 전달하는 방식의 연기를 했다. 연기를 안 하는 것처럼 연기하고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지방 촬영 당시 숙소에서 쉴 때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커피를 마시게 되더라”고 덧붙였다.
영화의 의미에 대해선 “세계사에서 손꼽히는 전투를 영화로 만든다는 건 감독님이 늘 외치시는 자긍심 때문”이라며 “영화적 즐거움도 보여드리겠지만 관객에게 화합과 자긍심 같은 감정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같은 날 인터뷰를 한 김 감독은 “이순신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국가의 녹을 먹는 장수이고 그중 우두머리이면서 백성과 닿아있는 부분이 큰 사람이다. 권력자였던 왕과도 긴장관계에 있었다”며 “다른 위인들에 비해 정치적 평가에서 상대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지점도 있다. 그런 분의 행적과 사상, 가치를 재평가한다면 지금 시대에도 오롯이 소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