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핫하다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다. 프로그램 이름은 ‘뿅뿅 지구오락실’로, 유명 방송 제작자인 나영석 PD의 작품이다. 4명의 여성 출연진이 해외를 누비며 게임과 미션을 수행하는 콘셉트인데 출연진 모두 MZ세대라는 점이 특징이다.
최근 제작진은 태국에서 출연자들을 낙오시키고 1시간 정도 떨어진 현지 식당을 찾으라는 미션을 줬다. 식당 이름은 태국어로 쓰여 있었다. 제작진이 상상한 그림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테다. 식당 이름을 해석하기 위해 현지인과 어설프게 소통하고, 익숙지 않은 현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뜻밖의 실수를 연발하는 모습.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결국 제한 시간을 넘겨 벌칙을 받게 되는 리얼 버라이어티다운 전개 말이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1992년생부터 2003년생까지 구성된 출연자들은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태국어를 번역하고 단번에 최단 경로를 검색했다. 인터넷 지도를 보며 대중교통도 척척 이용하고, 제작진에게 선물할 과일을 사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을 낙오가 아닌 놀이로 받아들였다. 언어가 다른 해외, 처음 가본 낯선 장소임에도 길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제한 시간보다 8분이나 일찍 식당에 도착한 출연자들을 보고 나 PD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미션 성공을 알린다. “그 시절이랑 다르잖아요.” 출연자의 능청스러운 한마디로 스타 PD는 한순간에 ‘옛날 사람’이 되고 만다.
영국왕립학회 수석연구원을 지낸 저널리스트 마이클 본드는 ‘길 잃은 사피엔스를 위한 뇌과학’이라는 책에서 길 찾기 능력이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핵심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작가는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 등을 제치고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수십, 수백㎞ 떨어진 집단을 찾아가 교류할 수 있었던 길 찾기 능력에서 찾는다. 자원의 위치, 포식자의 동향 같은 정보를 여러 집단과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진화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우리 유전자에는 탐험가라는 본능과 지형·지물, 위치, 방향, 공간을 인식해 길을 찾는 능력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GPS와 인터넷, 스마트폰이 주어진 환경에서는 이 능력을 좀체 꺼내 볼 기회가 없다. 애초에 길을 잃는다는 전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지도를 열면 나는 늘 선명한 동그라미로 지도의 중심에 서 있다. GPS 기술과 지도 서비스는 점점 정교해져 내가 바라보는 방향을 화살표로 표시해주기도 하고, 실제 거리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한다. 길을 찾는 건 더 이상 나의 몫이 아니다. 목적지를 입력하는 것만으로 지도는 가장 빠른 경로는 물론 교통수단, 도착 예상 시간까지 알려준다. 지도가 표시한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설령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손쉽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어디서든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주변 환경을 세심히 관찰하고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낯선 길을 낯설게 감각하려면 길에서 만나는 새로운 풍경을 인지해야 하는데, 가야 할 방향이 정답처럼 정해진 길 위에서는 ‘경로를 이탈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된다. 그 여정에는 우연도 없고 발견도 없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가장 빠른 시간에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지만 머릿속 지도는 갈수록 흐려지고 좁아진다.
미국의 비평가·역사가인 리베카 솔닛은 에세이 ‘길 잃기 안내서’에서 길을 잃는 것을 “미지를 향해 문을 열어두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솔닛은 자신이 “길을 벗어나기를 좋아하고, 아는 것 너머로 나가보기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지도와 다투는 나침반에 의지하여, 도중에 만난 낯선 사람들이 알려준 천차만별의 방향 지시에 의지해서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솔닛이 말하는, 길을 잃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 그때는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커진 셈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미션은 길 찾기가 아닌 ‘길 잃어버리기’일지 모르겠다. 낯선 길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
박상은 사회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