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사망했다. 총격이라는 요즘 시대 거의 보지 못했던 충격적인 방법의 사망 소식에 현지에선 추모 분위기가 불었고, 자민당은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그가 총리 퇴임 후에도 일본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만큼 우리로선 그의 죽음이 한·일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베 전 총리는 일본에서 ‘최연소’와 ‘최장수’ 총리 타이틀을 동시에 가진 정치인이다. 하지만 일본 우익의 상징적 인물로 역사 문제를 놓고 한·일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일단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아베 전 총리 추모 분위기 속에서 기존 정책을 계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선거 다음 날 “헌법 개정을 가속화하겠다”며 개헌을 공식화했다. 또 방위력을 5년 이내에 근본적으로 강화하고,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모든 것이 유세 중 총격 사망한 아베 전 총리가 ‘필생의 과업’으로 삼은 것들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파벌, 개인적 성향 등을 살펴보면 그의 집권 기간에 분명히 한·일 관계 개선의 기회가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그가 수장으로 있는 ‘고치카이’는 원래 이웃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소수파로서 아베 전 총리가 이끌던 최대 파벌 ‘세이와카이(아베파)’의 지원을 받아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 때문에 그는 최근까지 아베 전 총리의 눈치를 많이 살폈다. 총리 취임 후 각료 인선에서도 막후 실력자인 아베 전 총리의 주요 측근을 대거 기용했다.
하지만 이제 아베파의 수장이 사라졌다. 아베파는 당분간 후계 회장 없이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된다고 한다. 기시다 총리가 본인만의 정책을 국내 문제뿐 아니라 외교에서도 펼칠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 앞으로 3년간 대형 선거가 없는 ‘황금의 3년’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기시다 총리의 개인적 이력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2000년 일본 정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가토의 난’에 가담한 전력이 있다. 당시 가토파 수장이던 가토 고이치 전 자민당 간사장이 모리 요시로 정권 전복을 꿈꿨지만 실패로 끝난 사건이다. 가토파는 현재 기시다 총리가 수장으로 있는 고치카이의 전신이다. 그런데 기시다 총리가 주군으로 모셨던 가토 전 간사장은 1992년 관방장관 시절 일본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여를 처음으로 인정한 ‘가토 담화’의 주인공이다.
벌써 기존 정책 변화가 보인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다음 달 개각에서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를 부총리 등으로 기용하는 방안이 부상하고 있다. 스가 전 총리는 자민당 내 파벌에 소속되지 않은 인물로 무파벌 의원 사이에서 영향력이 강하다. 또 개각에서 자민당 파벌 2위 모테기파와 3위 아소파 소속 인물들이 입각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로선 일본의 정치 상황을 주시하면서 기시다 정권에 계속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좋든 싫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한·미 관계와 중국 견제에 플러스 요인이기 때문이다.
사족으로 기시다 총리는 타고난 술꾼이라고 한다. 두주불사로 일본 정계에서 가장 술이 세다는 풍문도 있다. 외무상 시절 같은 주당으로 이름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회담 때 술 대결을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윤석열 대통령도 술을 아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반진반으로 추후 있을 한·일 정상회담 때 윤 대통령이 관계 개선의 한 방편으로 술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 어떨까 한다.
모규엽 국제부장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