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만 피하자’… 경로당에 ‘휴게실’ 써붙이고 나몰라라

입력 2022-07-18 00:04
17일 오후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 경로당 출입문 위에 ‘경비원 휴게실’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왼쪽). 하지만 이 아파트 경비원들은 실제로는 경로당이 아닌 천장에서 건축 자재가 떨어지는 아파트 지하실 한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사업장에 근로자 휴게시설 설치·관리를 의무화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한 달 뒤부터 시행되지만 쉴 만한 환경이 안 되는 곳에 휴게실 간판만 내걸거나 화장실 등을 휴게실로 급조하는 데 그친 사업장이 여전히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열악한 휴게 환경 개선이라는 법 취지와 현실은 여전히 거리가 먼 것이다.

17일 찾은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 경로당에는 문 위쪽에 ‘경비원 휴게실’이라는 문구가 코팅지로 부착돼 있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측은 법 시행이 다가오자 이달 초 경로당으로 사용하는 공간을 그대로 경비원 휴게시설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 공간을 찾는 경비원은 사실상 없다. 입주민들이 머무르는 곳 한 켠에서 눈치를 보며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비원 A씨는 “경비원들이 고발하거나 구청에서 점검이 나올까봐 부랴부랴 휴게실이라고 문패를 붙인 것 같다”며 “불편해서 들어가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는 지난 3월에도 1개 동 옥상에 있는 9.9㎡(3평) 남짓한 공실을 휴게실로 지정했다. 커튼이나 차단막이 없어 대낮에는 내리쬐는 햇볕이 방 안으로 그대로 들어왔다. 창문에는 방충망조차 달리지 않은 상태였고, 바깥 바람에 의존해 쉬어야 했다. 의자나 탁자도 없었다. 국민일보 취재 시작 이후 관리사무소 측은 서둘러 커튼과 냉방 시설을 설치했지만, 여전히 이곳을 이용하는 경비원은 없다고 한다. 화장실을 한 번 사용하려 해도 지상까지 15층을 오가야 할 정도로 휴식에 필요한 아무런 설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비원들은 대신 각 동 지하에 임의로 마련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매트리스와 간이 화장실, 전자레인지, 선풍기 등이 갖춰진 지하에서 하루 8~10시간의 휴게 시간을 보낸다. 천장에서는 부스러기들이 수시로 떨어지고, 쥐가 나오기도 한다고 경비원들은 전했다.

인천 부평공단에 입주한 한 업체는 기존 화장실을 개조해서 ‘물류 노동자 휴게실 겸 탈의실’을 만들었다. 구색 맞추기용 성격이 짙었다. 냄새가 심하다는 근로자 불만이 쏟아졌지만, 업체 측은 “휴게실을 만드는 데 몫돈이 들고, 실제 설치해도 노동자들이 잘 쉬지 않는다”는 답변을 내놨다.

임시 방편을 둔 사업장도 있다. 서울 성북구 고려대 서울캠퍼스의 경우 대부분 노동자 휴게시설이 환기가 안 되는 지하에 위치해 있다. 학교 측은 휴게시설을 지상에 마련하는 대신 공기청정기를 지급하며 버티는 상태다.

해당 개정안은 다음 달 18일부터 시행된다. 상시근로자 20인 이상인 사업장 혹은 공사규모 20억원 이상의 건설현장은 면적 6㎡ 이상, 천장고 2.1m 이상을 확보하고 냉난방 기능을 갖춘 휴게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경비원과 환경미화원 등 특정 직종의 노동자가 2명 이상일 경우에는 상시근로자 10인 이상부터 적용 대상이다. 설치하지 않으면 15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설치·관리 기준을 준수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사업주에게 부과된다.

글·사진=이의재 기자 sentin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