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정부는 선진국 위상에 걸맞은 한국의 책임과 역할을 자임하면서 글로벌 중추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 민주주의, 인권, 법치 국제질서 등 가치를 지향하면서 국제연대를 돈독히 하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대·강화하며 경제안보를 확보해 가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가치외교는 국익 증진을 위한 실용외교와 적절히 조화되고 균형을 이룰 때 진가를 발휘한다. 무질서가 특성인 국제사회에서 가치에 치중하면 자칫 국력을 소모하고 외교의 기본 목적인 국익 증진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위성락 전 러시아 대사가 지적하듯 가치를 과도하게 강조하면 국제사회가 한국에 크게 기대하게 되는데, 행동이 못 미치면 국가 신뢰가 손상되고 예기치 못한 불이익을 당할 위험성이 존재한다.
한국이 선진국이 됐지만 아직 강대국을 자처하기는 이르다. 특히 G2인 미국과 중국도 각각 국익 극대화 전략을 추구하는 상황이므로 우리도 당연히 국익 최우선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반체제 언론인 암살 혐의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격렬히 비난해왔지만 유가 인하 협력을 요청하기도 하는 것이 국제질서이다.
따라서 위 전 대사 주장대로 다른 나라가 한국 외교정책의 방향과 수준에 대해 예측이 가능하도록 일관되게 말하고 행동해 한국에 대한 기대수준을 정리하도록 해야 한다. 말한 것은 행동에 옮기고, 또 행동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가치외교의 한계를 정해 언술도 이에 맞추는 것이 현명하다. 안영집 전 싱가포르 대사에 따르면 국제사회에서 다양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소국에도 핵심 이익이 있다고 지속 주장하는 자국 중심성으로 미·중 경쟁을 잘 대처해온 싱가포르는 예측 가능성 확보를 위해 단기 손해를 보더라도 정책의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외교의 몇 가지 현안을 점검한다. 먼저 중국 측엔 국민 여망을 반영해 상호존중이 중시돼야 함을 계속 주장할 수 있다. 단 미국이 5년간 추진해온 탈중국이 어려워 대중 관세 인하를 고려하는 실용외교를 하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가 탈중국을 외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미래 대중 정책은 가치 및 안보 요인과 함께 경제 논리도 고려돼야 한다.
최근 러시아가 반러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는 일본에 대해 평화조약 협상 중단, 외교관 추방, 어업협정 중단에 이어 사할린 석유·가스 사업에 참여한 일본기업을 퇴출시키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적인 경제 지원에는 최대한 성의를 보이되 공격무기 지원은 자제하는 것이 현명하다. 자칫 러시아가 북한에 미사일 대기권 재진입 기술 등 핵심 군사기술이나 부품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한·일 관계 정상화도 필요하고 바람직하므로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여론이 민감히 반응하는 사안이므로 일본도 여러 현안 해결에 전향적 자세를 보여야 진전될 것이다. 또 한·미·일 안보협력도 대북 억지를 위해 필요하지만, 반중 군사협력으로 진화하기는 어렵다는 우리 입장을 미국과 일본이 양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제사회가 대러 제재를 중심으로 3분 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정부는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호주, 싱가포르 등 동참 국가들과의 관계를 조금 더 긴밀하게 하고, 제재에 반대하는 국가들에 대해선 적대관계를 갖기보다는 우리의 가치 중시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종전보다 조금 멀리하는 정도의 외교가 적절할 것이다. 특히 중립을 지키면서 서구나 러시아 모두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도, 이스라엘, 베트남,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과의 전략적 협력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홍현익 국립외교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