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은 대표적인 규제산업이다. 규제를 쥐락펴락하는 것은 금융당국이다. 금융당국이 ‘갑(甲)’이고 금융기관이 ‘을(乙)’ 인 것은 수습 은행원도 아는 당연한 사실이다.
주식 결제기간을 현행 2영업일에서 1영업일로 단축하는 ‘T+1 제도’ 도입을 추진 중인 ‘을’ 신세 한국거래소는 ‘갑’인 금융위원회로부터 압력을 받고 입장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고 실토했다. 그런데 갑은 을에게 전화를 건 사실은 있지만 압박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누구 말이 맞을까.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한국거래소는 당초 ‘T+1 제도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고 국민일보에 밝혔고, 국민일보는 12일자 신문에 이를 보도했다. 이 보도를 본 금융위는 최종 결정권한이 있는 자신들과 논의없이 언론에 먼저 알리는 게 말이 되느냐는 취지로 항의했다고 한다. 거래소는 결국 ‘T+1제도 도입은 전혀 논의된 바 없다’는 입장의 보도해명자료를 낼 수 밖에 없었다. 불과 이틀 새 거래소 입장이 180도 뒤바뀐 배경을 금융위 압박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거래소 관계자도 “금융위 요청으로 실무부서가 해명자료를 즉시 배포해야 한다고 해서 급박하게 냈다”고 실토했다.
사실이 이런데도 금융위원회는 13일 보도반박자료를 통해 ‘금융위의 황당관치... “T+1 도입 검토 없다 하라”’는 국민일보 보도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금융위는 공공기관도 아닌 사기업인 거래소에 해명자료 배포를 지시하는 등 1980년식 관치를 저질러놓고도 이를 발뺌하면서 한편으로는 같은 날 금융개혁 추진을 위해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금융규제혁신회의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같은 금융당국인 금융감독원에는 검사 출신의 이복현 원장이 취임하면서 감독원 내부 개혁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1972년생 검사 출신 원장 임명은 금융권보다는 금감원 내부 개혁에 방점이 찍혀있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모피아’ 출신인 김주현 위원장이 바통을 이어받은 금융위는 이번 사건에서 보듯 과거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금융위가 규제혁신을 이끌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김지훈 경제부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