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이야기가 아니다. 책의 하얀 표지를 한 꺼풀 벗기면 무지갯빛 속지가 나오고 아래에 “작은 일일 뿐입니다(It was a small thing)”란 영문 글씨가 나온다. 의료선교사 주보선(David Chu·1923~2015)의 삶이 집약된 표현이다. 업적이나 건물을 남기지 않고, 그저 낮은 목소리로 사람을 세우는 일에 주력한 선교사. 환자를 사랑하고 수련의들을 돌본 겸손한 스승 ‘의사 주보선’(IVP) 이야기다.
주보선 선교사는 미국 장로교 파송으로 1967년부터 1988년까지 전주 예수병원 순환기내과 과장으로 진료했다. 중간에 자녀의 골육종 투병과 어르신 돌봄을 위해 미국을 오간 것을 빼곤 줄곧 예수병원 진료실을 지켰다. 벽안의 백인 선교사들과 달리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이다. 격변하는 중국 역사 속에서 공산당을 피해 상하이를 탈출한 거의 마지막 그리스도인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와 경영학을 공부하던 그는 소명을 접하고 베일러 의과대학으로 진로를 바꾼 뒤 심장 전문의가 된다.
주보선 선교사가 67년 절대빈곤 상황이던 한국에 입국할 당시, 미국의 순환기내과 전문의 연봉은 10~15만 달러 수준이었다. 65년 외국 의대 출신들이 미국에서 의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시험이 시작됐는데 3년간 약 3000명의 한국 의사가 미국으로 떠났다. 67년엔 한국 의대 졸업생의 61%가 아픈 이들이 널려 있는 이 땅을 떠나 미국행을 택했다. 가난하고 병들어 진료가 필요한 동포들을 뒤로하고 떠나는 한인 의사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택했다면, 주보선은 복음을 위해 ‘코리안 드림’을 택했다. 뉴욕 병원 심장내과 전문의에서 한국의 지방 소도시이던 전주의 예수병원 내과 과장으로 일하게 된 그는 인공심장 박동기, 심장 초음파 등 당시의 첨단 의료기술을 소개하는 한편, 수련의들과 영어 성경 공부를 시작하며 묵묵히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일을 이어간다. 복음서의 그리스도처럼 말이다.(마 9:35)
자기를 한껏 낮추는 이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책은 65세 선교사 정년을 맞이한 주보선 부부가 88년 한국을 떠날 당시 주변에서 헌정한 인형극 공연으로 시작한다. 다섯 자녀와 복작거리며 사는 삶, 언제 어디서든 쉽게 잠들던 주보선,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집까지 내주려 한 부인 게일 여사, 30분 이상 환자를 진료하기 일쑤인 세심함, 과거 주한미군 방송이었던 AFKN에 나오는 스포츠 중계에 열광하던 주보선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어 주보선의 영문 자서전을 김민철 전 예수병원 병원장이 번역한 글이 나오는데 지극히 무미건조하다. 그래서 책은 또다시 가족과 지인들의 주보선 회고를 추가로 담고 있다. 구성은 조금 산만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건물이나 업적이 아니라 사람을 남긴 진짜 선교사의 모습이 드러난다. 나를 지우고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나게 하는 이, 선교와 피선교 혹은 주는 자와 받는 자 관계라는 대상화를 거부하는 선교사, 선교는 삶을 통해 사람을 세우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출판사 IVP는 13일 오후 화상 플랫폼 줌(zoom)을 이용해 ‘의사 주보선을 기억하다 읽다 살다’ 제목의 북토크 행사를 개최했다. 한국누가회 이사인 김창환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는 “누가회가 하는 일은 단순히 아픈 사람들을 진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 현장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그런 측면에서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예수님 이름만 선교지에 남긴 주보선 선교사는 귀감이 된다”고 말했다. 이대행 선교한국 사무총장은 “선교는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고 주보선 선교사처럼 삶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며 “한국교회의 업적 위주 선교관도 이젠 바뀌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