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내가 본 바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이 말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도 맞고,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도 맞다. 그러나 이 말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신음하는 욥을 찾아온 친구들의 입에서 나왔다면 어떨까?
욥은 항의한다. “바른말은 힘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너희는 무엇을 책망하는 것이냐?” 욥은 그들의 말이 바르지 않다고 하지 않고, 바른말을 바르지 않게 사용하고 있다고 나무란다. 민음사의 ‘세계시인선’으로 소개된 ‘욥의 노래’(김동훈 옮김)에는 욥의 이 말이 “당연한 말이 얼마나 괴롭게 하는가?”로 번역돼 있다. 당연한 말이 사람을 괴롭히는 말이 될 수 있다. 어떤 옳은 말은 옳지 않게 사용됨으로써 나쁜 말이 된다.
발화된 맥락과 발화자 의도에 의해 이해되고 해석되는 것이 말이다. ‘무슨 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그 말을 했는가’를 문제 삼아야 하는 이유다.
“때때로 자연이 인간보다 대단한 일을 한다.” 지난 3월 한 정치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이 훌륭한 말은 그러나 동해안 산불이 특정 성향의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오지 못하게 할 거라는 기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된 순간 추악한 말이 됐다. 그 정치인이 설마 그런 뜻으로 썼을까 믿어지지 않지만 공교롭긴 했다. 맥락과 의도를 떠나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은 없다. 남을 찌르기 위해 신의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니까. 천사가 아니어도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다. 저 유명한 광야 시험 장면에서 악마는 성경을 인용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그러니까 욥의 친구들은 고난당하는 욥 앞에서 그 당연하고 바른말을 하고 싶은 욕구를 억제했어야 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 앞에서 자신의 부가 신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신의 믿음과 상관없이 삼가야 한다. 자식을 잃은 사람 앞에서 장수가 복이라는 말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신념이 아니라 배려의 문제다. 열세에 있는 선수의 공격적인 말은 지지를 받는데 우세를 점유한 사람의 같은 말은 왜 비난을 받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말은 물건과 같아서 놓인 자리에 따라 달라진다. 맥락 없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말의 속성이다.
갑자기 유명해진 사람을 향해 대중은 종종 “유명해지더니 사람이 변했어”라고 비난한다. 그 사람이 실제로 변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우쭐해지고 세상이 낮아 보이고 그래서 전과 다른 말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데도 그렇게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말이 독자적이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이고, 또 말의 내용보다 태도가 중요하다는 분명한 예시다. 전에는 용감하다고 칭찬받았던 어떤 말이 이제는 교만하다는 비난을 부르는 말이 될 수 있다. 말을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터득해야 하는 것은 수사학이 아니라 사람과 상황에 대한 고려다. 상황에 맞는 태도다.
물론 말의 내용이 중요하다. 상황에 따른 말 바꾸기가 장려될 수 없다. 말의 형식을 바꾸는 것과 말의 내용을 바꾸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신념을 바꾸지 않는 한 말(의 내용)을 바꿀 수 없다.
사람은 선서를 통해서만 선서하지 않는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선서이고 약속이다.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때 연인들은 단지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하는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는 그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않겠다고 선서하는 것과 같다.
말의 내용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얼굴을 바꾸는 건 어려워도 태도는 바꿀 수 있고, 그래야 한다. 맥락과 위치에 맞게 말(의 형식)을 바꾸지 않으면 말(의 내용)이 바뀌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유명해지더니 변했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승우(조선대 교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