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가 강세를 보이는 것은 한국 외환시장만의 일은 아니다. 에너지 위기가 발생한 유럽에서는 약 20년 만에 처음으로 1유로 가치가 1달러 수준까지 내려갔다. 일본의 경우 중앙은행이 엔화를 더 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24년 만에 가장 낮아졌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유로는 이날 오전 한때 1유로에 1.0006달러까지 하락했다. 2002년 12월 이후 20년 만에 최저치다. 2000년대 이후 달러 대비 유로 환율은 1.2~1.3달러대에서 움직였는데 ‘1유로=1달러’ 수준에 근접한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유럽으로 향하는 에너지 공급선이 끊기다시피 하면서 유로 가치가 급락했다는 분석이다. 유럽연합(EU)은 가스 수요의 40%가량을 러시아로부터 조달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공급이 제한되면서 타격을 받았다.
무역 등에서 악화하는 경제 여건도 유럽에서 달러 강세가 유지되는 배경이다. 전쟁발 에너지 위기로 지난달 유로존 물가 상승률은 8.6%에 이르렀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등 빚이 많은 국가를 중심으로 국채 금리가 급등하고 금융주 주가가 급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그렇지만 유럽중앙은행(ECB)은 금리를 대폭 올리기 어려운 처지다. 지난주 독일이 1991년 이후 처음으로 상품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는 등 경기 둔화 신호가 잇따라 나타나고 있어서다. ECB는 2016년부터 제로금리 정책을 유지해 왔는데, 오는 21일에도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 올리는 데 그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유로 가치가 0.95~0.97달러까지 하락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일본 엔화 대비 달러 가치 역시 계속 높아지고 있다. 지난 11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137.75엔까지 치솟아 1998년 9월 이래 2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의 경우 집권당이 통화 확장에 방점을 둔 아베노믹스 정책을 당장 선회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관측이 엔화 가치를 끌어내렸다. 지난달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0.75% 포인트 올린 미국과 달리 일본은행은 여전히 마이너스(-) 기준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이 세계적인 디지털 전환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산업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인식도 엔저 현상에 힘을 보태고 있다. 1988년 세계 시가총액 100대 기업 중 일본 기업은 53곳이나 됐지만 올해는 토요타 단 한 곳뿐이다. 두 번째로 순위가 높은 기업은 소니로 114위에 오르는 데 그쳤다.
김진욱 기자 real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