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핑톰 무용단은 1980년대 이후 현대무용의 성지가 된 벨기에의 대표적 현대무용단 중 하나다. 아르헨티나 출신 가브리엘라 카리조와 프랑스 출신 프랭크 샤르티에가 2000년 의기투합해 설립했다. 무용, 드라마, 영상, 음악의 결합을 통해 인간성 고찰을 보여주는 작품을 앞세워 현대무용계의 선도적 단체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선 무용수도 창작에 적극 참여한다. 협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무용수에게는 크리에이터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피핑톰 무용단에는 2009년부터 한국인 무용수 2명이 활동하고 있다. 오디션을 통해 함께 입단한 김설진과 정훈목이다. 김설진은 2014년 Mnet ‘댄싱9’ 시즌2 우승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 활동이 많아졌다. 그는 2014년 자신의 무용단 ‘무버’를 창단해 국내 공연계에서 다양한 작업을 하는 한편 배우로서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피핑톰 무용단에선 자신이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작품 투어 위주로 활동한다. 반면 정훈목은 현대무용 관계자 외엔 낯선 편이다. 장르의 성격상 팬층이 넓지 않은 데다 2010년대 들어 피핑톰 무용단의 2차례 내한 공연 외에는 국내 무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국대 무용과 학부와 대학원을 다닌 정훈목은 국내에서 ‘주목댄스시어터’라는 이름의 무용단을 만들어 활동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신진예술가로 선정돼 유럽에 갔다가 피핑톰 무용단의 오디션에 합격하며 전환점을 맞이했다.
피핑톰 무용단에서 꽃을 피운 정훈목은 14년간 크리에이터 및 댄서로서 6개 작품으로 43개국 133개 도시의 투어에 참여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피핑톰 무용단의 투어가 중단되자 개인 작업에 나섰다.
첫 성과물이 그가 감독한 댄스필름 ‘우라가노’(Uragano)다. 이 작품은 지난해 파리 국제 필름 페스티벌, 도쿄 국제 숏필름 페스티벌 경쟁 부문 파이널리스트에 올랐고 올 초 미국 할리우드 인터내셔널 골든 에이지 페스티벌에서 베스트 댄스 숏(Best Dance Short), 베스트 싸이-파이(Best Sci-fi) 등 2개 부문을 수상했다. 이탈리아로 ‘허리케인’을 뜻하는 ‘우라가노’는 15분 분량으로 이탈리아 출신 여성 무용가 엘리아나 스트라가페드의 몸짓을 통해 무의식 속에 일그러진 기억의 파편을 그렸다.
정훈목이 15~16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신작 ‘아난’(ANON)을 선보인다. 댄스필름 ‘우라가노’의 연장선에서 만든 작품으로 왜곡된 기억을 가진 75세 남성, 신체장애가 있는 9세 소년, 판타지 캐릭터 같은 20대 여성과 이들을 돕는 건장한 남성 3명이 출연한다. 제목 아난(ANON)은 영어의 ‘순’(soon·곧)과 ‘어나니머스’(anonymous·익명의)에서 따왔다. 고립감을 느끼는 각각의 인물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내면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모습을 그렸다.
정훈목은 ‘아난’ 공연을 앞두고 “한국 관객이 작품의 캐릭터나 스토리라인을 분명하게 이해하려는 시선에서 조금 벗어났으면 한다”면서 “관객이 각각 투영하는 캐릭터의 관점에 상상력을 조금만 더하면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