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연필 한 자루의 무게감

입력 2022-07-12 04:03

누구나 한 자루쯤은 있을 연필의 꼭지 부분에는 HB, B, 2B 같은 알파벳이 새겨져 있다. 대부분 HB를 쓰지만 미술 수업에선 4B를 손에 쥐기도 한다. 이 알파벳은 연필심의 강도(Hardness)와 진하기(Blackness)를 나타낸다. H는 단단하지만 색이 옅고, B는 진하지만 무르다는 걸 의미한다. 연필심은 흑연과 점토를 섞어 만드는데 그 비율에 따라 24단계(과거에는 18단계)로 나뉜다. 보통 시판하는 연필심의 경도체계는 8B~B, HB, F(Firm), H~6H의 16단계다.

H와 B를 사용하는 경도체계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로타르 폰 파버다. 그는 세계적 연필 브랜드 ‘파버카스텔(Faber-Castell)’의 4대 회장이었다. 로타르는 연필 길이 같은 표준을 정하고, ‘A.W.Faber’라는 이름으로 상표를 등록해 필기도구의 브랜드화를 일궜다.

파버카스텔은 한 해에 연필 20억 자루를 만들고, 10개국에 공장을 둔 세계적 기업이다. 연필, 만년필, 지우개 등으로 연간 1조원가량 매출을 올린다. 시작은 1761년이었다. 독일 뉘른베르크 인근의 소도시 스타인에서 옷장을 만들던 카스파르 파버는 나무 막대기 사이에 흑연 심을 넣은 연필을 제조해 팔았다. 길드 규정에 묶여 ‘회사’ 전환이 늦었던 스테들러가 최초로 연필을 생산하기는 했지만, 정식 등록을 19세기에나 하는 바람에 세계 최초이면서 가장 오래된 연필 회사라는 칭호는 파버카스텔 차지다. 4대 회장 로타르는 창업자의 증손자다. ‘파버’라는 회사 명칭은 상속인이자 로타르의 손녀인 오틸리에 폰 파버가 알렉산더 카스텔 뤼덴하우젠 백작(파버카스텔 6대 회장)과 결혼하면서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 알렉산더는 파버카스텔의 스테디셀러인 ‘카스텔9000’을 1905년 내놓았다. 굴러떨어지는 걸 막는 ‘육각형 디자인’을 처음 적용한 연필이기도 하다.

파버카스텔이 260년 넘는 세월을 이겨내고 ‘디지털 시대’ ‘4차 산업혁명’에도 꾸준함을 자랑하는 비결은 ‘쉼 없는 혁신’이다. 로타르는 연필의 길이와 경도를 체계화했고, 알렉산더는 육각형 디자인을 창안했다. 1908년에는 60가지 색상으로 수채화 빛깔까지 재현한다는 평가를 받는 색연필을 내놓았다. 8대 회장인 안톤 볼프강 파버 카스텔은 당시에는 생소한 ‘친환경’ 개념을 들고 나왔다. 그는 매년 목재 15만t 이상을 쓰는 데 따른 사회적 책임을 지겠다는 취지로 브라질 남동부에 숲을 조성했다. 어린아이들이 입에 연필을 넣는 일이 잦다는 점을 고려해 친환경 수성 페인트로 연필 겉면을 칠했다. 카스텔9000에 먼저 사용했는데, 파버카스텔 하면 떠오르는 짙은 초록색이 그것이다. 바닥에 던져도 부러지지 않도록 단단한 연필심을 쓴다든지, 프탈레이트를 사용하지 않아 무독성인 ‘더스트 프리 지우개’를 만드는 식으로 변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혁신은 ‘고객’을 중심에 두고 이뤄졌고, 소비자가 원하는 것 이상의 ‘경험’을 제공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이상적이라고 할 만큼 단단하면서 부드러운데 싸다”고 극찬했다. 독일 대문호 괴테, 샤넬 수석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도 즐겨 썼다. 또한 파버카스텔은 노동자 건강보험, 연금, 사택, 사내 유치원을 도입했다. 이게 1800년대에 이뤄진 일이다. 노동자 권익 보호나 지속가능 경영, 사내 복지 같은 개념이 생소하던 시절이다. 일찌감치 동행 혹은 상생에 눈을 뜬 셈이다.

장황하게 파버카스텔 얘기를 늘어놓은 건 샘이 나서다. 260년을 훌쩍 넘는 장수기업을 우리는 키워낼 수 있을까 싶어 부럽다. 혁신으로 무장한 기업가들이 끊임없이 한국의 경제·산업을 견인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도 생긴다. 연필 한 자루의 무게는 5g가량이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꽤 무겁다.

김찬희 산업부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