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경의 에듀 서치] 학생 허준이의 허벅지는 몇 센티였을까?

입력 2022-07-12 04:07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 수학부 석학교수가 지난 5일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학교에서 열린 국제수학연맹(IMU) 필즈상 시상식에서 필즈상을 수상한 뒤 환한 얼굴로 메달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축구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선 축구 잘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과거 왕조 시절에 고위 관료를 축구로 뽑았던 과거(科擧)제도 영향이란 분석도 있습니다. 국가가 인정하는 축구선수가 되면 부·명예뿐 아니라 권력도 갖습니다. 국가대표라도 되면 국회의원·장관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전문직·대기업 같은 인기 직장도 축구 실력이 좌우합니다. 이렇다 보니 대학도 축구 실력으로 신입생을 뽑습니다.

경쟁이 치열해 선발 방식은 민감하고 첨예한 쟁점이 됩니다. 이 나라에서 ‘공을 잘 찬다’는 건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라 평가하기도 어렵고 객관적으로 순위를 정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입 수험생 40여만명 전체를 축구 잘하는 순서로 줄 세우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정부는 고민 끝에 허벅지 굵기로 순위를 매기는 방식을 고안합니다. 허벅지가 굵을수록 달리기도 잘하고, 공도 멀리 찰 거라는 기대도 있고, 여러 사례가 실제 그러했으니까요. 축구 잘하는 이들을 봐도 대부분 허벅지가 굵었습니다. 그러자 학교는 온통 허벅지 근육을 키우는 데만 열을 올렸습니다. 허벅지 키우는 법이 핵심 교과목이 될 정도였습니다. ‘앞 근육’ ‘뒷 근육’ ‘안쪽 근육’ 등입니다. 허벅지 훈련 학원들이 번성하고, 돈 많은 가정은 고가의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합니다.

정부는 허벅지 두께를 측정하는 첨단 도구를 개발·보급했습니다. 객관적이고 표준화된 측정 도구입니다. 이를 통해 모든 고교생 허벅지를 아홉 단계로 등급화했습니다. 측정 절차, 위치, 방법 등에 대해 상세 규정도 마련했습니다. 워낙 경쟁이 치열해 0.00001㎜도 석차에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도 국제대회 성적은 영 신통치 않습니다. 허벅지 굵다고 공을 잘 찬다는 보장은 없나 봅니다. 영국에서 개최되는 ‘2022 THE 세계 축구대회’에서 제일 우수한 국가대표 선수 성적이 세계 54위였습니다. 선수들이 실전에선 공을 잘 못 찬 결과입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 게 선수 선발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축구에서는 주력이 중요하니 달리기 실력으로 뽑자고 하고, 어떤 이는 멀리 차기로 뽑자고 하는 등 여러 대안이 제시됐습니다. 운동장에서 실제 플레이하는 걸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뽑자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허벅지 굵기 대신 패스, 드리블, 전술 이해, 슈팅 능력 등을 두루 살펴보는 방안이 축구 전문가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선수 선발에서 전직 국가대표가 자기 자녀를 잘 봐 달라고 청탁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큰 파장이 일고 공정성 논란이 불거집니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선발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빗발치고 결국 다시 허벅지 굵기를 재는 선발 방식으로 돌아갑니다.

허벅지 근육이 크게 필요치 않은 분야도 허벅지 키우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화가도, 피아니스트도, 소설가도, 가수도, 자영업자도 허벅지 굵기를 늘리려고 애씁니다. 학교에선 허벅지만 훈련시키고, 허벅지가 굵지 않으면 불성실하거나 무능하다는 사회적 인식도 강합니다. 자기 허벅지 등급을 속였다가 빈축을 산 일도 생깁니다. 이리저리 시끄러워도 축구나라 교실에선 오늘도 ‘허벅지 굵기가 인생을 바꾼다!’라는 구호를 제창하고 있답니다.

이상은 교육부 관료로 20여년을 일한 박성수 전북대 사무국장이 쓴 ‘대한민국에서 학부모로 산다는 것’(공명)에서 발췌·요약한 내용입니다. 박 사무국장은 대입 정책을 관장하는 교육부 학술장학정책관 등을 지내 누구보다 대입 정책에 대한 고민이 깊은 전문가입니다. 인용 내용은 우리 교육 현장에 대한 뼈 때리는 풍자입니다. 국가대표 축구팀은 명문대학, 허벅지 굵기 측정은 수능을 상징하죠. 수능과 대입 제도가 ‘진짜 인재’를 걸러낼 수 있는가에 대한 강한 회의가 담겨 있습니다. 책은 아직 출판 전으로 곧 나올 예정입니다. 우연히 원고를 접했고 저자와 출판사에 요청해 미리 한 단락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출간 전 책 내용 일부를 꺼낸 이유는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학 교수의 필즈상 수상이 계기가 됐습니다. 한국에서 초·중·고교·대학을 나온 인물의 ‘수학 노벨상’ 수상이라고 우쭐댈 일인가 싶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공교육은 그의 수학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방황하게 했죠. 그가 수학의 길로 들어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는 필즈상을 수상한 일본 수학자였습니다. 한국에서 공부했지만 일본인이 발굴해 미국에서 꽃피운 수학 천재…. “(학창시절) 수학만 빼고 잘했다”는 뉴욕타임스 인터뷰는 왠지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재능은 뒤늦게 발현될 수 있다’고 항변하고 싶다면 적합한 인재 양성·발굴 시스템을 갖췄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중·고교 교육과정과 대입을 좌우하는 5지 선다형 수능은 이미 ‘괴물’이 돼 버렸습니다. 문제를 기계적으로 풀도록 하고 수학 교사들도 고개를 흔드는 ‘킬러 문항’들로 최상위권을 변별하고 있습니다. 일반 고교에선 준비하기 어려운 괴물 문항들입니다.

2년째를 맞은 문·이과 통합 수학은 더 황당합니다. ‘확률과 통계’ ‘미적분’ ‘기하’라는 수학의 다른 영역을 선택지로 주고 한 줄로 세웁니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 선수들을 한 줄로 세우는 것과 흡사합니다. 한국 공교육에서 수학은 변별력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 학생들이 전 세계에서 수학을 가장 싫어한다는 조사 결과도 이해갑니다.

우리 학교는 허 교수의 허벅지 굵기에만 매달리다 그의 온몸에 내재한 잔근육들과 그 잠재력을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 공교육 시스템에서 억눌려 사라졌을 천재가 수학에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허 교수의 필즈상 수상을 우리 입시제도와 공교육 빈틈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