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그건 ‘선택’이었을까

입력 2022-07-06 04:08 수정 2022-07-08 16:12

한 가족이 있었다. 아빠, 엄마, 딸. 맨 처음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아이가 등교하지 않는다며 실종 신고를 하면서 5학년 아이의 이름과 얼굴이 먼저 알려졌다. 그 가족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제 와서 아는 건 그들이 어떻게든 살기보다 결국 삶을 내려놓는 길로 향했던 마지막 행적뿐이다.

지난달 24일 수사가 시작된 ‘○○○ 일가족’ 실종 사건은 닷새 만에 이들이 바닷속에서 인양한 차량에서 발견되며 ‘완도 실종 일가족 비극’으로 다시 명명됐다. 최종 수사 결과 발표 전이지만 전문가들은 ‘자녀 살해 후 극단적 선택’으로 추정한다. 일가족 동반 자살이 아니라 명백한 자녀 살인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아진 건 의미가 있다. 어떤 경우라도 부모가 미성년 자녀의 생사를 결정해선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이 부부가 자녀의 목숨까지 거두기로 한 결정은 결코 용서받거나 면죄부를 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마음 속에 쉽게 떠나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수사기관이 이들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 나선 과정이 실시간 보도되면서 축 늘어진 아이를 등에 업고 숙소를 나서는 부모의 모습까지 공개됐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그 순간 부모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감히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경찰은 이 가족이 컴퓨터 관련 매장을 운영하다 지난해 봄 사업체를 정리한 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고 파악했다. 아파트 월세 35만원과 자동차 리스비 90여만원을 꼬박꼬박 내왔으나 어느새 대출금과 카드빚, 코인 투자 실패 등으로 1억5000만원의 채무가 쌓이고 관리비가 밀리며 점점 더 내몰렸던 것 같다.

급기야 지난 5월 ‘제주도 한 달 살기’를 떠난다며 아이 학교에 체험학습 신고를 하고 완도에 왔다. 집을 떠나 마지막을 준비하는 순간에도 이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찰이 일가족 세 명의 5월 통화내역을 분석한 결과 은행과 숙소 관계자를 제외하고 외부인과 통화한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 외엔 세 식구가 서로 주고받은 전화뿐이었다. 경제적 위기 상태로 내몰린 이들이 도움을 청할 사람이, 이들의 고통을 나눠주고 깊은 무력감과 좌절을 위로할 사람이 주변에 없었던 듯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진료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미뤄보건대 이들이 느낀 압박감과 위기감은 매우 컸을 것이다. 아이가 홀로 세상에 남아 살아갈 모습을 떠올렸을 때 그것이 함께 떠나는 것보다 못할 것이란 판단을 내릴 만큼 현실이 버겁게 느껴졌던 듯하다. 이들에게 개인 파산이나 회생 절차를 안내하고 어떻게든 살아보는 쪽으로 붙잡아줄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실제 이들처럼 사회적으로 고립된 가족을 돌볼 지역사회 공동체나 제도적 지원책이 우리 사회에 충분히 갖춰져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최근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이란 책을 낸 미국 예일대 의대 나종호 정신의학과 교수는 한국 언론이 자살 보도를 할 때 사용하는 ‘극단적 선택’이란 표현에 이의를 제기했다. 나 교수는 “자살을 시도하는 그 순간 그들에게 자살은 선택지가 아니라 현실의 고통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진다”며 “선택지가 없다고 느낀 사람에게 ‘선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한가”라고 묻는다. ‘선택’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어쩌면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당사자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물음이다.

실종 한 달 동안 누구도 찾지 않았던 이들, 아이 학교에서 신고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아무도 찾지 않았을지 모를 이들, 원인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던 이들의 마지막을 ‘선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김나래 온라인뉴스부장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