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교사로 일하다가 은퇴하고 그림 그리며 글을 쓰는 60대 후반의 여성, 문창과 다니며 소설가를 꿈꿨지만 아이 둘 낳고 키우다가 이제야 청소년 단편소설 습작을 시작한 50대 중반의 여성, 역시 아이 둘 키우는 평범한 주부였다가 카메라를 들고 사라져가는 동네 문방구를 기록하는 50대 중반의 여성, 공연기획을 하다가 두 아이를 낳고 경력단절을 겪었지만 6살과 4살 형제의 성장 이야기를 매일 밤 글로 남기는 40대 초반의 여성.
3년 전 고양문화재단의 ‘시민작가 양성프로그램 100개의 이야기’ 프로그램에서 만난 네 명의 여성이다. 책을 쓰고 싶은 오랜 바람을 품어 온 100명의 시민을 모집했고, 소설·시·에세이·여행기 등 각 분야별 책을 낸 작가들이 멘토가 돼 책 쓰는 과정을 돕고 이끌어 나가는 프로그램이었다. 첫날 고양아람누리 공연장에 모두가 함께 모였다. 작가들이 차례대로 앞으로 나서 각자 자신의 소개를 하면 멘토가 돼주었으면 하는 사람을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나는 책 한 권을 ‘먼저’ 냈다는 이유로 네 명의 여성을 만났다. 하지만 멘토라니, 글을 쓰는 데 멘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도 나보다 연배가 높은 그녀들을 돕기로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즈음 나 역시 연극에 대한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많은 분이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인생을 살면서 꼭 한 번은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열두 편의 클래식 연극을 모아 소개하는 책이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매일 밤 작은 내 책상에 불을 켜두고 글을 쓰는 시간은 때론 충만한 기쁨이었고, 때론 좌절할 만큼의 슬픔이었다. 누구와 이야기를 나눠 덜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책이란 오롯이 나를 대면하는 시간을 견디고, 보듬어 만든 진주와도 같으니까. 그래도 글 한 줄 못쓰고 밤새워 맞는 새벽녘의 어스름을 그녀들이라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녀들이 오랫동안 감추거나 미뤄뒀던 글을 향한 사랑을 엿보아 버렸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일이란, 그리고 그 글을 써서 책으로 꿰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누군가는 ‘책을 읽는 사람보다 책을 쓰는 사람이 더 많은 시대’라며 이전보다 쉽게 책을 내는 분위기를 조소하기도 하지만 글을 써 본 사람은 안다. 글 한 줄 밀고 나가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임을. 버지니아 울프는 첫 소설인 ‘출항’을 출간하는 데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장을 열일곱 번이나 고쳐 썼다. 오죽했으면 ‘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은 “다음 생에는 절대 글 쓰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까지 했을까.
하지만 엄마로, 아내로, 그리고 직업인으로 삶을 살아낸 그녀들은 다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초고의 독자가 되는 것, 내가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전하는 것, 그리고 홀로 글을 쓰는 그 마음을 격려하는 것뿐이었다. “진실하게 내 이야기를 써야 해요.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끝까지 쓰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책이 나왔다. 이서유 작가의 청소년 단편소설집 ‘창 밖은 맑음’. 3년 전 매주 만나서 읽고 수정했던 그 원고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책을 받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책 나올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를 겸해 네 명의 여성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그사이 나도 쓰던 책을 마무리 짓고 ‘이럴 때, 연극’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고, 고양시 구석구석을 발로 누비며 사라져가는 오래된 동네 문방구를 기록하던 분은 그간 찍은 사진과 글을 모아 ‘안녕, 문방구’라는 책을 완성했다. 나머지 두 분도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단다. 네 분의 여성을 마음속 깊이 응원한다. 책장을 여니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단정한 손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마음이 이내 화사해진다. 더 많이 읽히고, 오래 기억되는 책을 내기를. 그리고 다음 생에도 책과 글을 사랑하기를.
최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