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집권 45일, 출발이 너무 거칠다

입력 2022-06-24 04:06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586 출신 중 가장 정제된 정치인이다. 586들은 ‘싸가지가 없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그는 말이 고약하지 않고 무턱대고 자기주장만 내세우지도 않는다. 유연한 태도로 협상이 가능하고, 양보할 건 흔쾌히 내놓을 줄 아는 정치인이다. ‘저격수’ 역할인 야당 대변인과 원내대표를 할 때도 대통령이나 여당 지도부에 대한 적나라한 비난은 자제하는 등 정치적 도의를 지키려 애썼다. 청와대·여당에서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때 한번 눈 감아 달라고 부탁하면 모른 척 그냥 넘어갈 줄도 알았다. 그는 지금도 자신을 온건파라고 규정한다.

우 위원장이 제1야당의 새 선장이 됐다는 소식에 제대로 된 협치가 이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 위원장도 국정 운영에 협조할 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지난 19일 기자간담회를 하다가 전례없이 발끈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지금 여당은 야당에 양보하라고만 압박하고, 수사기관들은 (옛 여권 인사들을 줄줄이) 소환하고, (대통령실은) 전 정권이 북한에 굴복했다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한다. 집권 초기에 이렇게 주먹만 휘두르는 정권은 처음 본다”고 분을 감추지 못했다. 또 자신이 위원장이 된 지 9일이 지났는데 그때까지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 한 통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박근혜 탄핵’까지 언급하며 여권에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내놨다.

170석의 제1야당 대표가 그렇게까지 강하게 불만을 표출했으면 여권도 좀 멈칫하고 말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급기야 22일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야당을 향해 “5년간 탈원전으로 바보짓을 했다”고 맹비난했다. “탈원전이란 폭탄이 터져 원전업계가 폐허가 됐다”고도 지적했다. 전 정권을 비판해도 그렇지 ‘바보짓’ ‘폭탄’ ‘폐허’는 과한 표현으로 들린다. 앞서 윤 대통령은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북한어민 북송 사건과 관련해서도 전 정권을 겨냥하는 발언을 했다.

대통령이 너무 세게 나가면 여당이라도 야당을 달래줘야 할 텐데, 윤 대통령이 ‘바보짓’을 언급한 바로 그날 여당 원내대표는 언론에 “야당이 원 구성 협상 조건으로 이재명 의원 관련 고소·고발 취하를 요구했다”고 폭로했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그런 말을 안 했다고 했지만, 설사 요구했었어도 야당 파트너와의 비공개 협상에서 나눈 말을 폭로하는 건 신의에 어긋나는 정치다.

집권한 지 45일밖에 안 된 정권의 출발이 너무 요란스럽고 거칠다. 여권이 앞장서서 야권에 협력적 국정 운영을 부탁해야 할 마당에 먼저 싸움을 걸고, 걸어도 좀 심하게 건다는 느낌이다. 대통령과 여당만 그러는 게 아니다. 검찰에선 ‘산업부 블랙리스트’ 수사와 여성가족부 대선 공약 개발 의혹 수사가 본격화되고 있다. 감사원은 전 정권 관련 의혹이나 전 정권 사람들이 포진한 공공기관에 대한 감사에 나섰다. 금융감독 기관도 여권 인사들과 관련된 조사에 나설 것이란 얘기가 흘러나온다. 대선과 지방선거 연패로 휘청거리고 있는 야당에 전혀 숨 쉴 틈을 안 주고 있다. 수사하고 조사할 게 있으면 해야 하고, 뒤집을 정책이 있으면 뒤집기도 해야겠지만 정권 초반에 너무 토끼몰이하듯, 또 모욕적인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적폐 청산을 너무 거칠게 하면 먼 미래에 또 다른 적폐 청산을 부르기 십상이다. 무엇보다 야당의 협조가 중요한 정권 초에 그렇게 하는 게 과연 윤석열정부의 성공에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우 위원장 못지않게 박 원내대표 역시 합리적이고 융통성이 있는 정치인이다. 야당이 좀 손해를 보더라도 새로 들어선 정권에 정치적 허니문 기간을 줘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조금만 속도를 조절하고, 부드럽게 접근했다면 새 정부 출발에 큰 힘을 보탰을 사람들이다. 강경파가 득세하는 민주당에서 이런 지도부 조합이 만들어지기도 어렵다. 윤 대통령한테는 로또 당첨이나 다름없는 조합이다. 이들을 만나고도 협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윤 대통령이나 여당 지도부의 정치력이 부재하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도 윤 대통령처럼 김치찌개와 소주를 곁들인 자리에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얼른 자리를 마련해 야당의 불만을 속시원하게 들어주기 바란다.

손병호 편집국 부국장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