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경제정책방향에 담긴 ‘납품단가 연동제’는 14년 전 추진이 무산됐다. 원자재 가격이 오르는 만큼 납품단가가 오르지 않아 하도급 업체가 손해 보는 것을 막자는 취지였지만 시장 질서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목소리가 컸다. 새 정부도 납품단가 연동제를 들고 나왔지만 2008년 당시처럼 찬반 논리가 여전해 도입이 쉽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20일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을 보면 정부는 공정한 시장 질서와 물가 상승에 대한 대응책으로 납품단가 연동제를 들고 나왔다. 납품단가 연동제는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납품단가도 올려 하도급 업체 등 중소기업의 경영 어려움을 해소하는 내용이다.
2008년 이명박정부가 출범할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 정부가 들어서면 납품단가 연동제를 1순위 과제로 시행하겠다”고 밝혔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정부가 납품거래가격 결정에 개입하는 것은 시장 질서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는 기업 반발에 막힌 것이다.
이후 2019년 납품 대금 조정 협의 제도가 도입되면서 공급원가가 올라 하도급 대금의 조정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수급사업자가 하도급 대금의 조정을 신청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요건이 까다롭고, 거래 단절을 우려한 중소기업이 제도를 활용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생겼다.
최근 원자재 값이 급등하면서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 논의가 다시 나오고 있지만 찬반은 여전히 팽팽히 갈린다. 찬성하는 쪽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 등 최소한의 법적 규율이 필요하고, 대기업도 가격 상승 리스크를 분담해야 한다는 이유를 든다. 여야는 각각 이런 내용을 담은 법률 개정안을 제출했다.
김경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은 원자재 기준가격이 10% 이내의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한 비율 이상 오르면 원사업자가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라 추가로 발생한 비용을 하도급 대금에 반영해 지급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한무경 국민의힘 의원 대표발의안 역시 물품 등의 원자재 가격이 10% 이상 오르거나 내리면 변동분의 분담에 관한 사항을 약정서에 담도록 했다.
납품단가 연동제에 반대하는 쪽은 원자재 가격 인상분이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고, 장기적으로 기업 경쟁력에 저하된다고 주장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은 납품단가 연동제가 시행되면 대기업이 생산 비용을 낮추기 위해 국내 중소기업 제품 대신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 제품을 쓸 것이라고 전망했다. 납품단가 연동제로 국내 산업 생태계가 취약해질 것이란 얘기다.
정부는 “조정 협의 제도를 개선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율적인 상생 문화를 유도하는 방안을 병행하겠다”고 설명했다. 올해 하반기 납품단가 연동제를 시범 운영해 수용성 높은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사업자 간 첨예한 입장 차를 중재할 방안은 담기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세종=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