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원, 10만원으로… 거장의 작품을 소유하다

입력 2022-06-19 20:37 수정 2022-06-20 17:25
작품 한 점 당 수억∼수십억원 하는 거장의 초고가 미술작품을 주식처럼 쪼깬 뒤 많은 사람이 함께 구매하는 미술품 공동투자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현재 소투, 아트앤가이드, 테사, 아트투게더 등 4개 플랫폼이 성업 중이다. 사진은 이우환 작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공동 투자자를 모집하는 아트투게더의 홈페이지 공고문. 홈페이지 캡처

대기업 홍보팀에서 일하는 이민지(36)씨는 매주 화요일 오전이 기다려진다. 서울옥션블루가 만든 미술품 공동구매 앱 ‘소투’를 통해 ‘미술품 조각 투자’라는 신세계를 발견해서다. 그는 지난 1월 스마트폰에 앱을 깔고 회원으로 가입해 20만원을 적립한 뒤 지난 4월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시가 11억원) 10만원어치(1000원짜리 100조각)를 샀다. 이씨는 지난 16일 “앱에 들어가 새로 살 작품이 있는지, 내가 산 작품이 회원끼리 형성한 마켓에서 얼마에 거래되는지 등을 알아보는 게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수억원에서 수십억원 짜리 초고가 미술품을 주식처럼 쪼갠 뒤 여러 구매자가 나눠 사는 ‘미술품 조각(쪼개기) 투자’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2018년 하반기 아트투게더, 아트앤가이드가 첫선을 보인 이래 현재 소투, 테사 등 4개 플랫폼이 성업 중이다. 이들 플랫폼의 누적 공동구매액은 972억원으로 서비스 개시 3년여 만에 1000억원에 바짝 다가서고 있다. 시장을 선도적으로 개척한 아트앤가이드의 경우 2019년 첫해 16억원에 그쳤던 매출이 지난해 18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올해는 지난해의 5.5배인 1000억원 매출을 목표로 한다.


특히 미술품 경매 1위 회사인 서울옥션의 자회사 서울옥션블루가 소투를 런칭한 데 이어 2위인 K옥션이 지난 3월 아트투게더에 지분 투자를 하는 등 메이저 경매사가 모두 참여함으로써 관련 시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거장의 작품을 월급쟁이가 사는 것은 힘들다. 미술시장 최고 블루칩인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은 지난달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6호(31.8×41㎝, 1995년 작)가 265만6207달러(약 34억2500만원)에 낙찰됐다. 쿠사마 야요이를 비롯해 마르크 샤갈, 뱅크시, 김환기, 백남준, 이우환, 박서보 등 국내외 미술시장 거장의 고가 작품을 삼성전자 주식 사듯 월급쟁이도 몇 조각이라도 사서 컬렉터가 될 수 있는 건 블록체인 기술 덕분이다. 비트코인에 쓰이는 이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그림을 쪼갠 뒤 ‘조각 자산’에 고유한 인식 값을 부여하고 소유권을 추적할 수 있게 됐다.

게티이미지뱅크

4개 플랫폼은 매주 혹은 격주로 특정 요일에 미술품 공동 구매를 진행한다. 인기 작품은 수 분 만에 매각이 완료된다. 이씨도 “처음 이왈종 작가의 작품을 사려고 했지만 1분 만에 완판돼 기회를 놓쳤다”고 했다.

이 시장의 급성장 배경에는 일반인들도 몇천 원 혹은 몇만 원으로 거장의 작품을 ‘소유’했다는 기분을 주기 때문이다. 투자 자산으로서 매력도 있다. 미술시장이 호황 국면이라 플랫폼별로 16∼47%의 수익률을 내고 있다. 구입에서 매각까지 보유기간은 10개월 정도이며, 소투가 2개월 정도로 짧다. 주식으로 치면 단타 매매를 하는 셈이다.

대부분 블루칩 작가를 다루지만 소투는 다른 플랫폼에 비해 최울가 등 시장에서 부상하는 작가들도 많이 다룬다. 테사의 경우 샤갈과 뱅크시 등 구미의 거장을, 아트앤가이드는 한국인이 선호하는 아시아 작가의 작품을 함께 다루는 등 플랫폼별로 작가 구성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거래 수수료는 없거나 미미하다. 다만 테사의 경우 매각시 수익의 10%를 수수료로 낸다. 함께 구입한 미술품을 판매할지는 투표로 결정하지만 아트앤가이드처럼 전문가에게 위임하는 경우도 있다. 소투 등 일부 플랫폼은 미술품이 매각되기 전이라도 회원들끼리의 마켓을 통해 보유한 조각을 판매할 수 있다. 조각 투자 회사는 경매회사처럼 매각 전에 실물을 미리 볼 수 있는 프리뷰를 하지 않는다. 고객이 원하면 실물 관람 기회는 제공한다.

기존 미술계는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보낸다. 진입 장벽을 낮춰 30~40대 즉 MZ세대의 미술시장 유입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것으로 기대한다. 소투를 예로 들면 30대(38.0%)와 40대(28.4%)가 전체 회원 중 66.4%를 차지한다. 장기적으로 이들이 원화 구매 시장으로 진입할 것으로 기대한다.

주식투자를 하다 미술 분야로 투자 영역을 확장 중인 전업투자자 김도현(50)씨는 올해 들어 소액으로 투자를 시작해 현재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이우환의 ‘조응’ ‘대화’ 등 세 작품을 각각 20만원씩 구매했다. 그는 “미술품 조각 투자를 계기로 전시회 구경을 다니게 됐다. 실물 작품을 보니 또 다른 느낌이 들어 원화 자체를 구매하고 싶다는 욕구도 생긴다”고 말했다.

화랑 관계자는 “미술품 조각 투자의 경우 작품 보유 기간이 1년이 안 된다. 우리는 컬렉터가 작품을 구매할 경우 5년 이상은 보유하기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년 안에 한 작가의 작품 가격이 오르려면 비엔날레 초대, 유수의 미술관 전시 등 대형 이벤트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며 “장기간 보유하면서 작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구입해야 진정한 컬렉터 문화가 정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