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대학 시절 미국에 갔을 때 한 외국 친구가 그런 말을 했었다. 한국 여대생은 화장과 스타일이 너무 비슷하다고…. 유행하는 아이템이 있으면 모두 하나씩 하고 있단다. 뭐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아주 짙은 화장에 갈매기 눈썹이 유행했었다. 당시엔 그 말이 그다지 좋게 들리진 않았다. 개성과 다양성이 없다는 인상을 준다는 느낌이라 할까.
이후 2000년대 후반에 나는 트렌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두 달에 한 번씩 패션으로 유명한 도시를 촬영하러 다니며 동시에 칼럼을 하나 집필하게 됐다.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LA)에 대한 이야기를 쓰다 보니 재밌는 사실도 알게 됐는데, 현지인들의 트렌드 민감도에 대한 비교였다.
뉴욕의 심장인 맨해튼은 사실 크지 않은 지역(실제로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를 합친 정도)에 상업, 재정, 문화의 중심이 몰려 있다. 그러다 보니 고층 빌딩과 수많은 인구가 밀집돼 주차난과 트래픽을 피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뉴요커들은 걸어 다니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뉴욕의 거리는 몇 발자국만 걸어도 전 세계에서 온 모델과 패션 피플 그리고 디자이너 숍의 윈도들이 펼쳐져 있어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는 환경이다. 이에 반해 LA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대부분 자기 차로 이동해야 한다. 할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사는 도시이긴 하지만 굳이 애써서 보지 않으면 뉴욕처럼 트렌드에 어쩔 수 없이 노출되는 환경은 아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의 경우 여러 트렌드에 관심을 갖고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민감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서울은 상업과 재정 그리고 정치와 문화까지 중심인 세계적 도시 중 하나가 됐고, 우리는 대부분이 공동주거 형태인 아파트와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듣고 싶지 않아도, 알고 싶지 않아도 트렌드와 타인의 삶의 방식에 대해 서로 보고 들을 수밖에 없다.
가끔은 ‘왜 우리는 남들이랑 항상 같은 걸 원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고, 또 그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따라가기 바쁜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모든 게 트렌드다. 무엇을 먹을지, 어떤 옷을 입을지, 어디 가서 뭐하며 놀지와 같은 것뿐만 아니라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어떤 직업을 가질지, 그리고 어떤 집에서 살고 어디에 투자를 하며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지까지 말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삶의 방식에 트렌드가 있다.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남들이 하는 건 일단 다 따라서 해 보려고….”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직업상 트렌드에 민감한 나는 트렌디한 아이템을 입고 핫플레이스에 놀러가는데는 열심이었을지언정 그 이외의 삶의 방식에 있어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글쎄, 남들이 하는 걸 하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에 더 가치를 두고 살아왔다고 여겼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남들과 아주 다른 마이웨이를 걸어오지도 않았다. 내 삶에서 남들과 같은 걸 원하기도 했고, 또 나만의 다른 가치에 중심을 두고 꿋꿋이 고수하는 부분도 있었다. 무엇이 정답일 수는 없을 것이다.
엄마 말처럼 남들이 다 할 ‘그때에’ 집을 사고 주식을 했으면 내 삶이 더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때’ 친구 따라 강남에 집을 샀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 따라 트렌드를 열심히 좇아가면 그 뒤엔 성공과 행복이 있을까? 최소한 그렇게 될 확률은 좀 더 올라갈까? 그 대답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 시기에 유행하는 트렌드를 좇으려면 그 ‘시기’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 템포만 늦어도 촌스러워져서 안 하니만 못한 게 트렌드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지금 시기에 내가 좇아야 할 트렌드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 뒤엔 정녕 행복이 있을까?
이선영 CJ ENM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