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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이 분명하다. 그림자를 두고 왔다. 보통강 가 버드나무길 어디다. 그림자가 버드나무 그늘에 묻혔을 때 사랑에 빠진 걸 눈치챘어야 했다. 버드나무 가지들이 이리저리 그림자를 보듬었다. 눈물이 필요할지 모르겠다고 느낀 것 같은데 이념의 관성이 가로막았다. 평양의 쓸쓸함은 그림자 탓이다. 북방의 남자들이 눈물을 흘렸다면 그건 순전히 두고 온 그림자 탓이다.
변명이 소용없고 이성으로 살아지질 않는다. 가을이 오기 전에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 그림자에는 고요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게 하는 건 그림자 때문이다. 앞으로만 가는 발길을 붙잡기 위해, 쓸쓸한 날의 머뭇거림을 위해 그림자를,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
-신동호 시집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 중
평생 남북교류 사업을 하며 평양 개성 금강산을 두루 다닌 시인. 어느 가을 보통강 가 버드나무길 어디에 그림자를 두고 왔다고 한다. 그래서 가을이 오기 전에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고 한다. 뒤를 돌아보게 하는 건 그림자 때문이라며. 앞으로만 가는 발길을 붙잡기 위해, 쓸쓸해지고 머뭇거리는 시간을 갖기 위해 그림자가 필요하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