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증후군을 앓는 은혜씨에겐 집이 세상의 전부였다. 종일 집에서 뜨개질하고 때론 보이지 않는 허상과 싸우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그가 집 밖으로 나와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게 만든 건 그림이었다.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게 된 은혜씨는 4000명의 얼굴을 그린 예술가로 성장했다.
은혜씨가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2016년부터 3년간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니얼굴’은 그가 그림을 통해 삶을 되찾는 여정을 보여준다. 최근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해 배우인 줄 아는 이들도 있지만 은혜씨는 캐리커처 작가다. 주말마다 경기도 양평에서 열리는 대규모 플리마켓인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손님과 상인들의 얼굴을 그린다. 영화 제목인 ‘니얼굴’은 은혜씨 마켓의 상호다.
손님들은 은혜씨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색다르게 표현하는 방식이 좋다며 그를 찾아왔다. 은혜씨 어머니이자 만화가인 장차현실 프로듀서는 “내가 따라 할 수 없는 선”이라며 “은혜는 명암도 선으로 표현한다. 기존의 그림 문법과 달리 시선의 흐름으로 그린다”고 말했다.
86분의 상영시간 동안 카메라에 비친 은혜씨의 모습은 관객을 웃게 하는 힘이 있다. 주체적이고 당당한 은혜씨로 변하는 과정과 그의 작품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의외의 입담도 보여준다. “예쁘게 그려 주세요”라는 여성 손님에게 “언제나 뷰티풀이죠”라고 웃으며 답하고 완성된 그림을 손님에게 건네면서 “행복하세요”라고 덕담을 한다.
은혜씨는 그림을 그리면 행복하다고 했다. 힘든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추운 겨울 강변에서 온종일 그림을 그리느라 손이 부르텄다. 여름에는 엉덩이에 땀에 차 종기가 났다. 그래도 불평하지 않는다. 손님이 몰려도 “(저) 인기 많죠. 아유, 제가 엄청 좋은가 봐요. 아우, 골치 아파. 그놈 인기가”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며 미소짓는다.
행복할 때면 춤을 춘다. 상인들과 어울려 춤을 추며 즐거움을 표현한다. 그림을 그려 모은 돈으로 2018년 개인전을 열고 이듬해 전시회도 열었다. 평소 은혜씨의 그림을 좋아하던 손님과 상인, 친구들이 찾아왔다. 영화 초반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은혜씨는 종반에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은혜씨의 세계가 넓어지고 표정엔 짜증 대신 행복이 묻어있다.
‘니얼굴’은 오는 23일 개봉한다. ‘우리들의 블루스’ 출연 후 은혜씨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드라마에서 공개된 은혜씨의 그림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서울 용산구에서 1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은혜씨는 밝고 자신감에 찬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고 그림에 관심도 가져보고 좋아하고 그러면서 많이 그렸어요. (그림 그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늘고 또 늘었죠.”
은혜씨의 아버지이자 영화를 만든 서동일 감독은 “세상에 태어나서 무슨 쓸모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존재감 없이 방치된 삶을 살던 은혜가 그림을 매개로 사람들을 만났다”며 “그림을 그리느라 부르튼 손 마디마디, 시선, 눈빛, 표정에는 존재를 증명받고 싶고, 자기의 삶을 살고 싶은 의지가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은혜가 발달장애인으로서 경계를 넘어 아티스트로 당당히 서는 모습을 담으려 했다”고 덧붙였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