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반도체 초격차’를 겨냥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네덜란드를 방문해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확보를 직접 챙기고, 벨기에에서 미래 시장 개척 의지를 다졌다.
삼성은 유럽 출장 중인 이 부회장이 14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총리 집무실에서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를 만나 반도체 협력을 논의했다고 15일 밝혔다. 이 부회장과 뤼터 총리는 최첨단 파운드리 역량 강화를 위한 협력 확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문제 해소 등의 포괄적이고 전략적인 협력 방안을 놓고 대화를 나뒀다. 이 부회장과 뤼터 총리가 만난 것은 2016년 9월 이후 6년 만이다.
협력 강화의 초점은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확보다. 7나노 이하 초미세공정에서 반도체 기판에 회로를 그리려면 EUV 노광장비가 필요하다. 전 세계에서 이 장비를 만들 수 있는 기업은 ASML이 유일하다. ASML의 본사는 네덜란드 아인트호번에 있다.
이 부회장은 뤼터 총리 면담에 이어 ASML 본사를 찾아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경영진을 만났다. 이 부회장과 ASML 경영진은 차세대 반도체 생산을 위한 미세공정 구현에 필수적인 EUV 노광장비의 원활한 수급 방안, 양사 중장기 사업 방향 등을 놓고 폭넓게 협의했다. 이 자리에는 경계현 삼성전자 DS부문장도 배석했다.
이 부회장이 2020년 10월 이후 20개월 만에 ASML을 찾은 것은 그만큼 EUV 노광장비 확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EUV 노광장비는 삼성전자부터 TSMC, 인텔까지 7나노 이하 공정의 도입을 본격화하면서 공급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다. 각사의 장비 쟁탈전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서 TSMC를 추격하고, 메모리 1위를 공고히 하는 ‘반도체 초격차’를 달성하기 위해선 ASML 장비를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삼성그룹 총수인 이 부회장이 직접 챙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중요한 경영 현안인 것이다. 이번 방문으로 삼성전자가 TSMC, 인텔 등 경쟁업체보다 EUV 노광장비 확보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는 기대도 나온다.
이 부회장은 다음 날에는 벨기에 루벤에 위치한 유럽 최대 규모의 종합 반도체연구소 ‘IMEC’를 방문했다. 이 부회장은 IMEC에서 최첨단 반도체 공정기술 외에 인공지능(AI), 바이오·생명과학, 미래 에너지 등 첨단분야 연구 과제에 대한 소개를 받고 연구개발 현장을 살펴봤다.
IMEC 방문은 이 부회장이 삼성의 미래 전략 신사업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IMEC는 반도체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선행 연구를 하는 곳이다. 삼성그룹이 최근에 발표한 ‘5년간 450조원 투자’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번 유럽 출장을 계기로 이 부회장이 ‘미래 성장엔진’ 발굴에 전력을 쏟아붓는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재계 관계자는 “여러 제약조건이 있지만 글로벌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극대화한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가만히 있기는 어렵다”면서 “이 부회장과 삼성전자가 향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기 위해 더욱 공격적인 행보를 펼쳐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