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조각가 페릴레스가 시칠리아의 악독한 참주 팔라리스에게 고문 기구를 만들어 바친 일이 있다. 콧속에 피리를 넣어둔 청동으로 만든 암소인데 소 안에 죄수를 집어넣고 닫은 다음 밑에서 장작불을 지피면 그 안에서 죄수는 뜨거워 소리를 지르게 되고, 그 비명이 암소의 코에 붙은 피리를 통해 음악 소리로 바뀌어 나오는 그런 신박한 고문 기구였다.
그런데 그 암소의 첫 번째 희생자는 이걸 만든 페릴레스였다고 하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전설에 따르면 고통의 비명이 청동 암소 밖에선 아름다운 음악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이 소리를 무척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끔찍한 이야기이다. 그나마 전설이라는 게 다행스러울 정도이다.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 격으로 불리는 키르케고르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전설로 흘려 넘기지 않는다. 그는 시인을 청동 암소 안에 들어간 죄수로 비유한다. 아름다운 시구 이면엔 시인의 몸과 영혼을 마른 수건 짜내듯 나온 비명이 숨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청동 암소에서 신음이 변해 흘러나오는 음악이 어디 시인의 비명뿐일까. 정직한 목사의 설교도 이런 것 아닐까. 누구는 설교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쉽고 즐겁다고 하는데 나 같은 얼치기 목사는 설교 원고 한 줄 만들어내는 게 달궈진 청동 암소 뱃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고역이다. 그나마 그런 비명을 아름답게 들어주고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소리에 매번 비명횡사할 걸 알고도 청동 암소 뱃속에 기어들어 간다.
담임목사는 그나마 양반이다. ‘부’자가 붙은 교역자들은 어떤가. 교회 안에서 전지전능을 요구받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부교역자들 아닌가. 오죽하면 ‘냉장고에 코끼리 넣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퀴즈에 ‘부교역자 시키면 된다’는 블랙 유머가 나돌 정도일까 싶다.
그렇다고 생계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 누구 하나 미래를 책임져 주지도 않는다. 말은 똑같이 교역자인데 ‘부’라는 글자 하나 붙었다고 부교역자는 그저 배워야 하는 사람이고 교회 안에서 소비되는 임시직 소모품 정도로 취급된다. 청동 암소 뱃속에 들어간 목사는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지만 부교역자들은 심장에 바늘이 디밀고 들어와도 입술 꽉 깨물고, 외마디 신음도 틀어막아야 밥줄 끊기지 않는 그런 운명이다.
그러고 보면 청동 암소보다 더 끔찍한 고문 기구는 ‘부’라는 고문 기구 아닌가. 부교역자들에게 담임목사의 청동 암소 타령은 사치로밖에 안 들릴 게다. 도대체 부교역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경에서 ‘가난하다’는 말을 사회적 의미로 풀면 자급자족 경제 시스템인 가족 공동체의 기반이 약해 소작농으로 전락한 사람들과 품삯 일꾼, 절대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일부 목자와 어부들, 그리고 3대 약자로 꼽히던 나그네, 고아, 홀로된 여인이 이에 해당한다.
오늘날엔 사회적 소외계층과 근무 여건이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포함되겠지만, 교회에 적용하면 부교역자도 거기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자기 소유의 토지 없이 지주의 토지를 부여받아 땅을 경작하고 거기서 추수된 일정 비율로 살아가는 소작농, 지주의 말 한마디에 경작하던 땅을 환수당할 위험에 놓인 불안한 소작농, 교회 부교역자를 여기에 비유하는 일은 과한 것일까.
교회란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몸, 거룩한 성도의 교제, 성만찬 공동체, 모든 신자의 만인 제사장직, 사랑, 소명 등의 말을 교회가 강조하려면 부교역자에 대한 처우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우린 모두 똑같은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다. 적어도 우리가 교회라면 청동 암소 안에 누가 갇혀 있는지, 그 소리가 음악인지 비명인지 돌아봐야 한다.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