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한국 사람들을 외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식당에서 일하는 여종업원을 이모라고 부르거나 만나자마자 일단 나이부터 확인하고 형, 동생으로 호칭하는 것도 우리에게만 자연스럽다.
관습의 차이라고 이해하면 간단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 관습의 무의식적 메커니즘, 가족끼리만 쓰는 호칭을 가족 아닌 관계에서도 남용하는 심리적 동기에 깃들어 있는 욕망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을 공연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왜 가족 사이에 통용되는 호칭을 대부분 인간관계에 두루 사용하는 것일까. 왜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인데 나이가 많은 남자는 자기를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고 나이가 조금 어린 여자는 그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일까. 남자들은 왜 만나자마자 나이, 학번, 기수 등을 묻고 바로 형님인지 동생인지를 정하는 것일까.
호칭은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의 관계를 결정한다. 관계에 따라 호칭이 정해지는 것이 순리지만 반대로 호칭이 관계를 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뭐라고 부르는지 들으면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있다.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이 같을 수 없다. ‘여사님’과 ‘씨’가 같을 수 없다. 호칭에 아무 뜻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라는 제목의 정용준 소설이 있는데, 그 내용이 이렇다. 병을 얻어 가석방으로 나온 아버지를 성인이 된 주인공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한다. ‘나’의 나이가 다섯 살일 때 감옥에 들어갔다가 24년 만에 나타난 아버지는 타인이나 마찬가지다. ‘나’가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과의 부자 관계이다. 그 낯선, 병든 남자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으려고 ‘나’는 필사적이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부자) 관계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그러면 그 호칭에 맞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래도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끝끝내 버틴다.
조직폭력배들은 ‘형님’이라고 부르는 대상에게 무조건 복종한다. 가족 간 호칭은 위계와 서열의 호칭이다. 이것이 조직폭력배 세계만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남자들은 왜 형님이라고 부르고 불리는 걸 좋아할까. 아주 순진한 사람만이 이 현상을 친밀감의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소설 속 아버지가 “그래도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형님과 동생이 되는 순간, 즉 혈육이 되는 순간, 합리적 사유와 공적 책임은 희미해지고 비합리적이고 사적인 인정만 남는다.
손위 남자 형제는 권위적인 가부장제 아래에서 통상적으로 아버지의 권리와 의무를 대행하는 자로 이해돼 왔다. 특히 오빠는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은 가부장의 권위로 여동생을 보호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당연하게 해왔다. 오빠는 여동생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 권한이 부여됐다. 여동생은 오빠에게 복종해야 했다. 왜냐하면 오빠는 가장인 아버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억압과 폭력이 용인되는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연인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오빠라는 호칭이 데이트 폭력의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하면 억측일까. 말의 위력, 호칭의 잠재적 영향력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사람만이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형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형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오빠라고 불리는 사람은 오빠 노릇을 하려 한다. 의무를 권한과 혼동하고 보호를 통제와 구별하지 못하는 그릇된 가부장제의 어떤 오빠들은 보호를 내세워 폭력을 사용한다. 오빠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한다.
기우인지 모르겠으나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향해 오빠라고 부르는 팬덤 현상이 최근 들어 우리 정치권에까지 나타난 것을 보고 의아하고 우려하는 마음도 생겼다. 당과 인민의 ‘어버이’라고 불리는, 가장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북쪽의 지도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호칭이야 아무려면 어때, 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족끼리 쓰는 호칭을 가족 아닌 사람들끼리는 쓰지 않는 것이 봉건적, 가부장적, 비합리적 사유에서 벗어나는 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이승우(조선대 교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