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내가 힘이 없다지만 화가 나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 이런 푸대접을 할 수가 있나.” 베트남전 참전용사 김완규(77)씨는 17일 보훈병원에서 겪었던 일을 꺼내며 전화통화 내내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한 달 전 그는 지병 관련 검사를 받기 위해 보훈병원에 초음파 검사 예약 문의를 했다. 예약 날짜는 1년 뒤로 잡혔다. 검사 날짜가 한참 뒤로 밀린 건 담당 의사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젊은 시절 ‘청룡부대’로 불리는 해병대 제2사단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전투 중 무릎에 총탄을 맞는 상처도 입었다. 전쟁 이후엔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렸다. 평소 애국자라 자부해왔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적잖은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1년 뒤면 내가 이미 죽었을지 어떻게 알아. 사람 가지고 장난칠 거면 병원을 하지 말든지.”
윤석열 대통령이 현충일인 지난 6일 중앙보훈병원을 방문해 “보훈병원은 치료·재활·요양까지 토털 케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훈 의료의 핵심”이라고 했지만, 정작 국가유공자들은 보훈병원 이용에 애를 먹고 있다. 의사들의 연쇄 이탈로 일손이 크게 부족해진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유행을 거치면서 의료진 처우가 다른 곳에 비해 열악한 보훈병원을 떠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관리기관인 보훈복지의료공단의 적자를 병원 수익으로 메우는 구조적 문제도 10여년째 이어지고 있다.
의사 못 찾는 유공자들
전국 6개 보훈병원에서 그만둔 의사는 지난 10일 기준 올해에만 최소 34명이다. 공단에 따르면 중앙보훈병원에서 15명이, 광주보훈병원에서는 19명이 떠났다. 광주를 포함해 대구, 인천 3곳 병원장은 수개월째 공석이다. 의료인력 웹사이트 ‘메디게이트’에 지난 9일까지 공지된 보훈병원 전문의 모집 공고만 최소 9개다.
보훈병원은 종합병원으로 분류된다. 임금은 일반병원보다 낮아도 의대생들이 수련의(레지던트) 과정을 거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있고, 직업안정성이 높다. 하지만 최근 공고를 내도 길게는 수년째 인력이 충원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훈병원에서 일하는 한 의사는 “한 보훈병원에서 사직한 의사를 다른 보훈병원이 데려가는 등 보훈병원 내부 ‘인력 빼가기’까지 벌어진다”고 말했다.
의사들은 임금 격차 확대를 주원인으로 꼽는다. 기존에도 격차가 있었지만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차이가 더 벌어졌다. 내과나 정형외과 임금은 여타 종합병원 대비 약 3분의 1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람이 구해지지 않자 급히 높은 임금을 주고 성과계약직 의사를 들여 빈 곳을 메우는 일도 잦아졌다. 이 경우 임금체계는 더욱 헝클어진다.
대구보훈병원에 있는 한 의사는 “다른 의사가 다 그만두거나 휴직을 하는 바람에 의사 혼자 환자를 200명가량 진료해야 하는 진료과도 있다”고 했다. 그는 “인력이 부족해 의사가 아닌 간호사가 약 처방을 하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진다. 명백한 불법이지만 사람이 없어 어쩔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구멍 메우는 보훈병원
보훈병원은 수익을 내도 이 돈을 의료진을 붙잡는 데 쓰지 못한다. 경영을 맡은 국가보훈처 산하 보훈복지의료공단은 다른 부문 손해를 메우는 데 급급한 모습이다. 공시에 따르면 공단은 지난해 보훈병원 등 의료사업에서 348억여원 흑자를 냈지만 보훈요양원 등 복지사업에서 58억여원, 교육사업 21억여원, 공단 본사사업에 268억여원 적자를 냈다. 적자 규모가 가장 큰 본사사업의 경우 43%가 인건비다. ‘의료사업 흑자, 다른 부문 적자’ 양상은 매년 반복돼 왔다.
특히 유공자 초고령화에 따라 늘린 보훈요양원 운영에서 손실이 크다. 2017년 감사원 감사에 따르면 2008~2015년 보훈요양원 누적적자는 약 56억원이었다. 당시 6개이던 요양원은 현재 원주요양원이 추가돼 7개다. 당시 감사원은 “계속 보훈요양원 운영을 공단에 위탁하면 누적손실이 늘 것”이라고 전망했다.
무리하게 병원을 건립해 감사원 지적을 받은 경우도 있다. 감사원은 인천보훈병원 건립에 대해 “이미 중앙보훈병원을 증설했기에 같은 권역 내 설립할 필요성이 낮았다”고 지적했다. 공단은 500억원 이상 사업에 실시되는 정부 예비타당성 심사를 피하려 해당 병원 병상을 당초 계획의 절반 이하인 130개로 줄이는 ‘꼼수’까지 부려 개원했다. 현재 이곳 의사는 20명이다. 여태 응급실도 열지 못했고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는 진료과 자체가 아예 없어 종합병원에 미치지 못한다.
의사들은 보훈병원 예산과 공단 예산을 분리해야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공단이 의료사업 수익으로 다른 손실을 보전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주인숙 중앙보훈병원 산부인과장은 “다른 공공의료기관과 비교하면 보훈병원 자체가 지니는 이점이 크다. 외부병원만큼은 아니어도 일정 수준 처우만 보장되면 의사들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가장 수익 규모가 큰 중앙보훈병원을 중심으로 예산을 관리하면 전체 보훈병원의 인력과 장비도 무리 없이 운영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의사노조 관계자는 “보훈 의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며 중앙보훈병원 의료진 핵심인력 40~50명 수준의 집단 사직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단 관계자는 “처우 개선 관련 태스크포스(TF)를 지난달부터 운영하고 있다”며 “일단 타 병원 65세에 비해 5년 짧은 보훈병원 의사 정년을 연장하는 등 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다만 예산구조 개편 등에 대해서는 “관할 법을 개정하는 등 공단 자체적으로는 손댈 수 없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