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진영이 무한정 군비 확장을 시도했던 냉전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옛 소련이 붕괴한 1991년 12월까지를 일컫는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한 시대를 풍미하며 전 세계 경찰국가를 자임한 미국과 자웅을 겨뤘지만 경제적 고립과 체제 모순으로 무너졌다. 90년 10월 동·서독 통일로 소련 붕괴가 시작됐고, 그 이듬해인 91년 7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된 바르샤바조약기구는 해체됐다. 그리고 소련까지 해체되면서 냉전시대는 막을 내렸다.
세계는 비로소 첨예한 이념 대결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냉전시대 지속됐던 핵전쟁의 위협과 공포도 사라진 듯했다. 물론 소모적 군비 확장 경쟁도 없어졌다. 비록 이란과 북한이 이런 대세의 흐름을 거부하며 핵무기 개발과 군비 확장을 시도했지만 국제사회는 어느 정도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올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때아닌 군비 확장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자국 이익을 위해선 언제든 다른 국가를 침공할 수 있고, 수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는 전쟁도 가능하다는 오래전의 기억을 깨웠다. 바야흐로 신냉전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전 세계 주요국은 군비 확장을 서두르고 있다. 특히 2차 대전 주요 전범국인 독일과 일본의 군비 확장은 의미심장하다. 독일 상원은 지난 11일 군 현대화에 1000억 유로(134조원) 규모의 특별방위기금 조성안을 최종 승인, 확정했다. 독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냉전 종식 후 사실상 방치 상태에 있던 독일군의 재건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로써 독일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는 국가가 된다. 독일 상원은 이번 기금 조성을 위한 헌법 개정도 승인했다.
일본 집권 자민당 내에선 방위비로 현재의 약 2배인 95조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럴 경우 일본은 세계 국방비 지출 9위에서 미국 중국 독일에 이어 일약 4위로 발돋움하게 된다. 현재 일본의 방위비가 우리와 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이 군비를 우리의 두 배 이상 쓰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북한과 중국을 빌미로 군비 확장을 서두르고 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북한의 미사일 기술이 예상 이상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억지력이 압도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간신히 억제됐던 핵무기 경쟁도 다시 불거질 조짐이다. 실제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최근 발간한 ‘군비와 군축 및 국제 안보에 관한 2022 연감’을 통해 냉전체제 이후 수십년간 줄어들었던 전 세계 핵무기 숫자가 앞으로 다시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 등 9개국이 보유 중인 핵탄두는 1만2705기로 집계했다. 북한은 현재 20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뉴욕타임스는 소련 패망 이후 국방 예산을 대규모로 줄이며 평화에 취했던 유럽 전체가 31년 만에 군비 확장 모드에 돌입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움직임에 우리의 상황도 좋지 않다. 한국은 핵실험을 준비 중인 북한, 극한의 갈등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중국, 군비 확장을 서두르는 일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잔인함을 보여준 러시아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도 다른 국가들처럼 군비 확장에 나설 수 있지만 한계가 있다. 대신 한·미동맹 강화를 통해 북핵 위협을 억제·봉쇄하고, 일본과의 외교 복원을 이뤄내야 한다. 전형적으로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중국에 대해선 우리를 얕보지 못하도록 당당한 외교를 펼칠 필요가 있다.
모규엽 국제부장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