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은 조선시대부터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정승부터 노비까지 모든 계층이 도박에 열중했다. 종류도 여러 가지다. 투전, 쌍륙, 골패처럼 태생 자체가 도박과 밀접한 놀이는 말할 것도 없고 바둑과 장기 심지어 윷놀이, 씨름, 연날리기 같은 민속놀이도 도박 종목이었다. 이쯤 되면 배달의 민족이 아니라 도박의 민족이다.
선비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활쏘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작은 일종의 여흥이었다. 국왕이 연회를 겸한 활쏘기 대회를 열고 우승자에게 상을 주었다. 술과 음식이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권장했다. 한명회는 “무사는 반드시 술을 마신 뒤에야 활을 잘 쏠 수 있다”고 했고, 성종 임금도 “활쏘는 사람은 술기운이 있어야 잘 쏜다”고 했다. 적당한 취기는 도움이 됐던 모양이다. 지역사회 단합을 위해 국가가 장려한 ‘향사례’라는 활쏘기 대회 역시 음주를 동반한 행사다. 금주령이 내려도 활쏘기를 겸한 음주는 눈감아 줬다.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래는 더 심한 법. 심신단련이라는 취지는 간데없고 먹고 마시는 행사로 변질됐다. 그것도 모자라 내기가 끼어들었다.
원래 돈을 걸고 하는 도박은 조선시대에도 금지였다. ‘대명률’에 따르면 돈을 걸고 도박한 자는 곤장 80대에 처한다. 도박장을 제공한 자도 마찬가지다. 판돈은 몰수다. 다만 현장에서 체포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으므로 단속이 쉽지 않았고, 술이나 음식을 걸고 내기하는 건 허용했다. 편을 갈라 승부를 겨루고, 진 쪽이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내기 활쏘기는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점차 판이 커지면서 내기 수준을 넘어섰다. 큰돈이 오가고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도 생겼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도박 활쏘기를 금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한 사람이 반대했다. 조선 후기 수학자 규재 남병철이다.
그는 말했다. “도박 활쏘기를 하는 사람들은 입으로만 약속을 하고서도 이긴 사람은 돈을 차지하고 진 사람은 패배를 인정한다. 심지어 재산을 탕진해도 군말이 없다. 이것은 신뢰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신뢰로 다스려야 한다. 지금 백성들이 신뢰를 지키며 도박을 하니, 이것은 금지하면 안 된다.”
남병철 문집 ‘규재유고’에 나오는 말이다. 도박은 사회악이지만 이 또한 신뢰로 맺어진 계약임에 분명하다. 규칙에 따라 승부를 겨루고 결과에 승복한다는 신뢰가 없으면 도박은 불가능하다. 남병철은 사회적 신뢰 회복을 위해 도박 활쏘기를 금지하지 말자고 했지만 정말로 도박을 허용하자는 의도는 아니었을 게다.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는 도박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리라.
지방선거가 끝났다. 당선을 위해 급조한 터무니없는 공약들이 앞으로 어찌될지 궁금하다. 지하철은 과연 연장할까? 도로는 새로 착공할까? 공항은 정말 이전할까? 아마 대부분의 공약은 실현되지 않고 다음 선거에 그대로 다시 등장할 것이다. 하기야 대통령부터 당선 후 공약을 뒤집고도 사과 한마디 없는데 일개 지자체장에게 공약 파기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예전엔 부끄러워하는 기색이라도 있었건만 요새는 선거용일 뿐이라며 뻔뻔하게 말을 바꾼다. 이러니 정책 선거가 실종되고 비방이 난무하는 게 당연하다.
선거는 도박과 비슷한 면이 있다. 우선 누구도 결과를 알 수 없다. 참가자가 악수를 두느냐 묘수를 두느냐에 따라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운이 작용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승자 독식이다. 후보는 당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온갖 공약을 쏟아낸다. 공약이란 후보와 유권자의 계약일진대 유권자는 애당초 공약을 믿지 않고, 후보는 당선되면 공약을 슬그머니 파기한다. 신뢰 잃은 정치는 도박만도 못하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