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오래 하면 자연스럽게 드는 착각이 있다. 이 분야에서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게 많다는 오해다. 오해는 오래될수록 믿음으로 변한다. 믿음은 자신을 속이기도 해서 때로 모르는 것인데도 자존심 때문에 아는 체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러면 그야말로 병이라 부를 만하다. 노자 71장에 나오는 ‘不知知病(부지지병)’은 이와 같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도 이제 20년 가까이 헌책방 생활을 하고 보니 가끔은 그런 병적인 일을 겪곤 한다. 자주 반성하며 살고 있지만, 상대방도 나와 동급으로 병자일 때는 황당한 자존심 대결로 이어질 때도 있다.
우리 책방에 가끔 들르는 C씨는 자기 자랑을 즐기는 사람이다. 책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게 뭔가 자랑하고 싶어 책방에 오는 게 아닐까 할 만큼 입만 열면 자랑만 해서 영 달갑지 않은 손님이다. 한번은 자기가 미술에 대해서 잘 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젊은 시절 화가 아무개 선생 밑에서 그림을 배웠고, 또 다른 선생 밑에서는 제자로 생활했다는 등 끊임없이 자기 얘기를 늘어놓았다. 결론은 책을 한 권 찾고 싶다는 거였는데, 외국 화가 ‘가구인’의 작품집을 구해 달라는 거다. 그는 특유의 얕잡아보는 말투로 “책방 오래 하신 주인장이 유명한 가구인을 모르시진 않겠죠?” 하며 물었다. 나는 순간 자존심이 상해 가구인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안다고 답했다. 심지어 알지도 못하는 가구인의 화풍을 칭찬까지 했다.
나는 가구인 찾기에 열중했다. 미술 전문은 아니지만, 책방 일을 제법 오래 했다고 자부하는데 그런 유명한 화가 이름을 모르는 내게 화가 나기도 했다. 가구인은 누굴까? 이름만 보면 일본인 같기도 하다. 서양미술사 책을 뒤져봤지만 가구인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나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주말엔 서울 청계천과 동묘 쪽 헌책방을 돌며 가구인 책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발견했다! 그날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점심도 먹지 않고 동묘 근처 헌책방을 헤집고 있었다. 그때 영어로 된 그 이름을 봤다. ‘GAUGUIN’. 이럴 수가. 손님이 찾던 가구인은 사실 고갱이었다. 본인도 이름을 잘 알지 못해 고갱을 알파벳 그대로 읽어 가구인이라 말했던 거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며 나를 얕잡아 본 손님도 미웠지만, 자존심 때문에 덩달아 가구인을 안다고 하며 칭찬까지 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밥도 거르면서 눈에 불을 켜고 가구인을 찾아다녔던 내가 한심했다. 이거야말로 그 옛날 노자가 말한 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가구인의 정체를 알았지만 나는 다시 손님이 책방에 왔을 때 그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그 화가를 모른다고 솔직히 말했다. 손님은 자기도 다시 알아보겠다며 돌아갔다. 그렇게 조용히 돌아갈 사람이 아닌데 이상했다. 아마 그사이 본인도 잘못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진정한 앎이란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던 옛말이 더욱 마음 깊이 다가왔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