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집시법 개정, ‘위인설법’ 대신 여야 논의를

입력 2022-06-14 04:03 수정 2022-06-14 04:03

미국의 어떤 학자는 연방 수정헌법 제1조를 ‘세속의 성서(Secular Bible)’라 부른다. 국교가 없는 나라에서 국민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가치인 종교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성서에 비유할 정도로 소중하지만 언론·출판의 자유에 비해 집회의 자유에는 많은 규제가 따른다. 집회 내용에 따른 규제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으나 타인의 사생활, 주민의 평온 등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시간, 장소, 방법적 규제는 가능하다.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도 예컨대 공공장소에서의 고출력 확성기 사용 금지, 주거지역에서의 피케팅 제한, 의료시설 근처에서의 집회 제한 등을 들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도 제21조에서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규정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부터 이른바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통해 주로 집회(시위)의 자유 보장보다 통제에 중점을 두어 왔다. 약간의 개정을 거치긴 했으나 위헌 논란이 있을 정도로 원칙적 금지, 예외적 허용의 규정 체계는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2003년부터 이어진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집회·시위의 장소적 제한을 크게 완화시킨 계기가 됐다. 외교기관, 국회의사당, 각급 법원, 국무총리 공관 경계 지점으로부터 100m 이내에서 일률적으로 집회·시위를 금지한 집시법 제11조 규정을 위헌(헌법불합치) 선언한 것이다. 헌재 결정에 따라 현행 집시법은 각 기관의 기능을 침해할 우려가 없을 때 등 집회·시위가 허용되는 경우를 개별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과거에 비해 집회·시위의 권리를 두텁게 보호하는 방향으로 진전돼 온 것이다.

우리의 경우 이제는 집회·시위의 자유 보장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문제를 낳고 있다. 집회·시위가 교통 방해 등 지나친 방종으로 이어지거나 일상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로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거나 유튜버의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되는 등 오히려 폐단이 심각해진 것이다. 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 양산 사저 인근 집회로 문제가 널리 알려졌을 뿐 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집회 장소에서 하루 종일 장송곡을 틀어 놓는 등 ‘악성’이라고 불릴 정도의 집회는 비일비재하다. 일부 야당 의원이 문 전 대통령 사저 앞 시위를 규제하기 위한 집시법 개정안을 발의한 것도 일견 이해할 수 있다. 여당 의원은 대통령 ‘관저’에 집무실을 포함하는 개정안도 내놓았다. 하지만 특정인 보호를 위해 집회 장소를 제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유엔인권규약 등에 따르면 ‘평화적 집회의 권리’는 법률로 보장돼야 하며, 평화적 집회는 언제라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열릴 수 있어야 하고, 집회·시위는 그 대상이 ‘보이고 들리는 곳’에서 열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집회의 자유의 본질이다. 헌재 역시 원칙적으로 집회 장소를 항의의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금지한다고 판시한다.

당연하지만 집회·시위의 자유가 무제한의 자유와 방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작정 법 개정안을 발의하기 전 현재의 집시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면 충분한지,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는지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이다. 집회와 관련해 국민이 어떤 불편을 겪어 왔는지, 국민 불편을 최소화하면서 의사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폭넓은 의견을 수렴할 필요도 있다. 철저한 실태 조사와 공청회 등을 거친 후 법 개정을 추진할 때 ‘위인설법’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어땠는데”라는 자세를 벗어나 여야가 충분한 논의 끝에 함께 집시법 개정안을 발의하면 어떨까. 여야 모두 집권도 해보고, 야당도 해본 지금이야말로 역지사지가 가능한 때 아니겠는가.

노동일(경희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