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이를 생각해 본 일이 없어요.”
내 귀를 의심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나이 먹는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없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이 말은 분명 조영숙 지휘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는 1934년생으로 올해 88세다. 현재 아이온케드로스 합창단 단장이자 지휘자다.
세계적으로 보면 2021년 기준으로 빈 필하모니오케스트라를 이끈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가 94세로 최고령 현직 지휘자였다. 우리나라도 현직 최고령 지휘자군이 있다. 국립합창단 단장을 지낸 나영수, 코리아남성합창단을 이끈 유병무, 인천시립합창단을 이끈 윤학원 지휘자이다. 이들은 모두 1938년생으로 동갑내기들. 조영숙 지휘자는 이들에 비해 4살이 많다. 현재 초교파합창단인 아이온케도로스합창단을 이끌고 있다. 그녀가 빨간 복장으로 지휘봉을 잡으면 모든 이의 마음을 하나로 사로잡는 마법사로 변신한다.
그녀가 늙지 않는 비결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 꿈을 꾸는 것이다. 그것이 나이를 잊게 하는 명약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위축되고 꿈을 꾸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늙기 시작한다. 조영숙 지휘자는 천진난만한 소녀 모습이다. 나이 들면서 주름이 생기고 노쇠해 가는데 어디서 저런 거침없는 행보가 나오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그녀의 식단은 단순하다. 역삼각형으로 먹는다. 아침에 정성을 들여 많이 먹는 편이고 점심 저녁 순으로 대충 챙겨먹는다. 식사시간은 평균 1시간 정도로 다른 사람들이 다 먹고 일어날 때 식사하기 시작하는 셈이다. 밥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천천히 먹는다. 식단은 육해공 가리지 않는다.
현행 노인복지법 제26조에 따르면 만 65세 이상자를 노인으로 정의하고 지하철 무임승차 등 경로우대 정책을 실시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노령인구가 점차 증가해서 연령을 상향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다. 지난해 7월 통계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을 대상으로 1960~2020년 기준 노령인구의 구조를 밝힌 바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인구 중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15.6%로 이미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2026년이면 20%를 넘어 초고령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처럼 노년인구의 증가는 세계적 추세다. 얼마 전 국제연합(UN)은 새로운 노인기준을 마련한 바 있다. 만18세에서 65세까지를 청년, 만66세에서 79세까지를 중년, 만80세에서 99세까지를 노년, 만100세 이상을 장수노인으로 정의한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올해 만 60세 정년에 걸려 직장에서 은퇴하게 되는 필자는 청년으로 직장을 떠나게 되는 셈이다. 100세 시대를 생각할 때 앞으로 남은 30~40년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것이 큰 과제다.
이런 현실이 조영숙 지휘자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그의 말대로 나이를 잊고 계속 인생의 꿈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대처법인 듯하다. 조영숙 지휘자의 삶은 필자와 같이 이제 막 직장을 은퇴해 여생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1남 2녀의 어머니로 본인를 포함해 자녀와 손자손녀, 증손녀까지 합치면 18명의 자녀손을 두고 있다. 박태준 회장과 함께 초창기 포항제철을 창립한 멤버 중 한 명이며 후일 영남대 공과대학 교수를 지낸 김성수 교수가 남편이다. 고인이 된 김성수 교수는 신촌 로터리에 있는 신촌교회 장로이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주변에서 노래를 잘한다고 해서 음악을 전공했다. 경기여중고를 나와 이화여대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한 다음 문성여중고, 이천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후 남편을 따라 포항실업전문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포항제철 부인회 합창단을 시작으로 지휘자의 길에 들어섰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독창회를 2회 열었고, 신촌교회권사로서 미리암찬양대와 다윗찬양대를 지휘했고, 그 뒤에는 탤런트였던 임동진 목사가 담임했던 열린문 교회에서 찬양대를 지휘했다.
가장 어려웠던 때를 묻자 남편과 사별할 때였다고 했다. 우울증이 찾아올 무렵 자리를 박차고 나가 윤재천 교수에게서 문학을 사사 받고 수필가로 등단한 이후 현재까지 7권의 에세이집을 출간한 바 있다. 삶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성령님이 함께하신다는 굳센 신앙과 문학과 음악으로 그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나이를 잊은 조영숙 권사의 행보에 대해 주변에서 시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 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자 도리어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주위 시선을 의식해서 눈치를 보고 할 일을 못하게 되면 예술가의 삶이 끝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올해 환갑을 맞은 필자에게 철들지 말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철들면 모든 게 끝이란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한다는 생각에 김진홍 두레교회 목사님을 존경하게 됐다고 한다.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데살로니카전서 5장 16~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좋아하는 찬송은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즐겨 듣고 흥얼거린다고 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요즘 청소년들이 경쟁에 매몰된 생활을 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좋은 학교, 나쁜 학교로 나눠 아침부터 저녁까지 입시에 몰두하는 기계처럼 소진돼 간다. 청소년들의 좌뇌와 우뇌를 고루 개발하기 위해 음악, 미술, 좋아하는 취미생활과 같은 인성교육을 중시하는 교육정책을 펼쳐 주기를 교육당국에 당부하기도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내년 4~5월로 예정된 아이온케도로스합창단 제3회 정기공연 준비와 8번째 에세이집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는 도중 나이를 잊은 듯 소녀처럼 꿈을 꾸는 당찬 모습이 앵글에 잡혀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소녀의 눈에는 지혜자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은퇴를 앞두고 새로운 삶의 시발점을 찾기 위해 고민하던 필자에게는 그녀가 보여준 무언의 눈빛이 모든 것을 다 말해주고 있었다. 인생은 어차피 한 때의 광기, 겁먹지 말고 당당히 꿈을 꾸며 달려가라고 했다. 조영숙 권사의 삶과 신앙은 세상의 나이 따위는 잊어버리고 계속해서 꿈을 꾸며 믿음 안에서 자기 인생에 새롭게 도전하라고 웅변하는 듯했다.
김용원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