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존안자료’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심각한 문제다. 국정원이 “재직하며 알게 된 직무사항을 공표하는 것은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입장을 내자 박 전 원장은 곧바로 “공개발언 시 더 유의하겠다”며 사과했지만 그렇게 끝낼 일이 아니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기본을 망각한 채 ‘나는 너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협박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은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군사독재의 잔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적 조치가 있었지만 늘 문제가 터졌다. 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 과정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이병호·남재준·이병기 전 원장이 모두 교도소로 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임명한 원세훈 전 원장까지 전직 국정원장 4명이 수감됐다. 박 전 원장은 그런 잘못을 바로잡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떳떳한 정보기관을 만들라는 임무를 받았던 인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했기에 정보기관의 잘못된 행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퇴임한 지 1개월 만에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의 60년치 (사찰) 자료가 있는데 내용을 보면 ‘카더라’에 불과하다”고 공개한 것이니 매우 부적절하다.
박 전 원장은 국정원장으로 재직할 때 자료를 폐기했거나, 법적으로 불가능했다면 철저하게 봉인한 뒤 법령 개정을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그의 발언으로 국정원에는 지난 60년 동안 정치인 등 주요 인사를 사찰한 자료가 아직 남아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폐기됐으리라 생각했던 이 자료가 봉인조차 이뤄지지 않아 권력자가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다는 것도 입증됐다. 이러니 국정원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는 지금 당장 이 자료를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 말로만 국정원 개혁을 외칠 게 아니라 누가 언제 이런 자료를 만들어 어떻게 이용했는지까지 철저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