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 모두가 새로움을 찾는 시대지만 우리를 버티게 하는 건 오래된 좋은 것들인지 모른다. 낡은 것의 가치는 쉬이 매기기 힘들다.
종종 지나다니는 길에 탑건이란 아파트가 있다. 아파트 이름이 웬 탑건이람, 처음엔 의아하기만 했다. 아파트를 지은 사람이 영화 ‘탑건’을 엄청 좋아했나, 영화와 관련된 좋은 추억이 있나, 톰 크루즈의 팬인가. 전투기에 관심이 많거나 공군 출신 혹은 전직 파일럿인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다 말곤 했다.
1987년 국내 개봉한 ‘탑건’의 속편이 오는 22일 개봉한다. 35년 만이다. 시사회장에 온 사람들은 마음이 달떠 있었다. 영화 속엔 원조 꽃미남 할리우드 스타의 앳된 모습이 중간중간 등장했다. 곱게 나이 들어 이제 환갑이 다 된 그는 액션 연기를 직접 소화해내며 온몸으로 ‘나 아직 살아 있다’고 말했다. 35년 전처럼 그는 전투기와 평행선을 그리며 가와사키 바이크를 타고 달렸다.
영화는 기다린 세월을 배신하지 않을 만큼 재미있었다. ‘탑건’이 어린 시절 또는 청춘의 기억을 소환하는 세대라면 진한 감회에 젖을 거라고 누구라도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어릴 적 친구를 만나 신이 난 듯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탑건’이 팬들과 가슴 벅찬 재회를 나누는 동안 또 다른 세대의 오랜 친구 쥬라기 시리즈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1993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 공원’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교본,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국내의 많은 사람들은 그토록 실감나는 공룡 영화를 처음 접했다. 시각적 충격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그리는 공룡의 이미지는 ‘쥬라기 공원’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공룡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폭발했고, 쥬라기 시리즈는 공룡 영화의 대명사이면서 한 세대의 문화적 아이콘이 됐다. 사람들은 영화의 굿즈를 샀다. 여기저기서 공룡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됐지만 영화의 인기는 오랫동안 전 세계적인 것이었다. 시리즈 마지막 편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은 지난 1일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했다. 개봉 당일 오전 기준 사전 예매량이 50만장을 넘어섰다.
영화관에선 다 같이 앞만 보고 있어도 옆 사람의 작은 동요를 느낄 수 있다. 시리즈 첫 편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객들은 반가운 마음을 서로서로 느꼈다. 영화는 인류와 자연의 공생을 염원하며 30년의 세월을 정리했다. 쥬라기 시리즈와 이제는 헤어져야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사람이 곧 콘텐츠일 때는 또 다른 얘기가 된다. 송해 선생의 별세 소식은 한 시대의 부고(訃告)로 다가왔다. 방송을 챙겨보는 사람이 아니었어도 대한민국 국민이면 ‘전국노래자랑’ 시그널 송을 알았다. 그 프로그램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송해 선생은 모든 이들에게 성실하게 살아라, 소박하게 살아라, 즐겁게 살아라 말씀하시는 듯했다.
황해도 출신인 그에게 실향민들이 가지는 감정은 애틋했다. 올해 아흔한 살이 되신 외할머니는 개성이 고향이다. 외할머니는 친구의 안부를 확인하듯 매주 일요일 ‘전국노래자랑’을 보셨다. ‘저이도 나도 힘든 세월 살아왔구나, 노년에 이르렀구나, 열심히 버티는구나’ 생각하신다고 했다.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끈끈함이 있다. 특정 세대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가진다.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지만 오래된 것들에 애착을 가진다. 그래서 콘텐츠 업계의 매출을 이끄는 하나의 축은 오래된 빅팬이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의 상당 부분은 오래된 이야기다. 오래된 이야기들은 역사를 잇는다.
아파트 이름이 왜 탑건인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몰라도 굳이 상관은 없다. 아파트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각자의 오래된 기억을 소환할 것이다.
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