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한 9일 대구 수성구 범어동 변호사 사무실 빌딩에 있던 사람들은 말 그대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며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이날 오전 10시55분 발생한 불은 22분 만에 완전 진화됐으나 한 사무실에서만 7명이 사망하고, 50명이 화상을 입거나 연기를 흡입하는 등 인명 피해가 컸다.
경찰은 용의자가 사무실을 막은 뒤 인화물질을 뿌리고 방화한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용의자가 방화 뒤 분신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경찰은 용의자가 오전 10시53분쯤 혼자 마스크를 쓴 채 흰 천으로 덮은 물체를 들고 건물에 들어서는 CCTV 화면을 확보했다. 용의자가 해당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간 지 23초 만에 불꽃이 이는 장면도 포착됐다.
사망자 7명이 발생한 203호와 같은 층에 있던 한 변호사는 “대피 과정에서 봤는데 최초 발화 지점으로 추정되는 변호사 사무실 문이 열려 있었다”며 “방화범이 문을 연 채 인화물질을 뿌리고 불을 지른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다른 변호사는 “폭발음과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듣고 나왔는데 문 손잡이가 뜨거워 몸으로 밀치고 탈출했다”고 전했다.
이 건물에는 변호사 30여명의 사무실이 입주해 있다. 병원으로 이송된 상당수는 변호사였다. 불이 나자 건물에 있던 사람들은 위층 또는 옥상으로 대피했다. 일부는 방독면을 쓰고 탈출했다. 한 변호사는 “공포의 시간이 지난 뒤 소방관들이 건넨 방독면을 쓰고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용의자는 투자금 반환 소송 진행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상대측 변호사 사무실에 방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2013년 대구 수성구의 한 주상복합아파트 신축사업 시행사에 6억8000여만원을 투자한 뒤 일부 돌려받은 돈을 제외한 5억3000여만원과 지연손해금을 달라며 시행사 및 대표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그는 이후 지난해 다시 시행사 대표를 상대로 약정금 반환소송을 냈는데, 1심에서 패소하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었다. 시행사 대표의 변호인은 이날 불이 난 사무실의 변호사였다.
전문가들은 폐쇄적 구조 건물에서 인화물질에 따른 돌발적 방화가 발생하고 피난 통로가 막히면서 피해가 커졌을 것으로 분석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사망자들이 탈출하기 어렵도록 출입문 쪽에서 방화가 이뤄져 대피하지 못하고 희생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박재성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방화범들은 보통 휘발유 같은 인화성 물질을 가져와 불을 지르는데, 인화성 물질에 직접적으로 점화원을 갖다 대면 연소가 폭발적으로 일어나서 화재가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고 설명했다. 건물 지상층에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았던 점도 한 원인으로 지목됐다.
대구=최일영 기자, 이의재 양한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