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토 슈타이얼이 묻는다 “재난·역병의 시대 미술관 역할은”

입력 2022-06-12 20:31
히토 슈타이얼의 미디어 아트 작품 ‘소셜심’. 팬데믹 시대에 유럽에서 번진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을 아바타를 사용한 경찰 군무 게임처럼 만들었다. 경찰 아바타의 신체 움직임은 시위 현장의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 등 데이터 추이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작가는 자본과 권력의 데이터 장악과 활용에 관심이 높다. 손영옥 기자

미디어 아티스트 히토 슈타이얼(56·사진)은 2015년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참여한 것을 비롯해 카셀 도쿠멘타(2007), 뮌스터조각프로젝트(2017) 등 세계적인 현대미술제에 초대받았다. 그는 영상 작업을 하면서도 자신의 예술세계와 예술철학을 비평가적 시각에서 쓴 저서를 여럿 남긴 저술가다. 이런 차별화된 지점이 일본계 독일 작가인 그를 독일을 넘어 세계적인 작가로 알렸다. 그러니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하는 회고전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의 바다’전을 보러 가려면 국내 번역된 책을 한 권쯤 골라서 읽는 게 좋다.


전시 제목 ‘데이터의 바다’는 그의 저서 ‘면세 미술: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의 한 챕터에서 땄다. 책에서 슈타이얼은 “우리는 자료(데이터) 속에서 익사하는 중”이라며 소비자의 데이터가 어떻게 자본가와 권력에 의해 교묘하게 추출돼 활용되는지 보여주고 비판한다. 전시는 책에서 언급한 그런 생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실천의 장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작품 ‘미션 완료: 벨란사지(‘발렌시아가 방식’이라는 뜻)’(2019)는 패션업계도 실제 상품보다 인터넷상에서의 밈(인터넷상에서 퍼지는 짧은 사진이나 영상)을 미끼로 홍보 전략을 펴는 현실을 프랑스 유명 브랜드 발렌시아가를 통해 비꼰다. 강연 형식의 영상이라는 점이 슈타이얼답다. 발렌시아가의 패션쇼 런웨이를 차용한 회오리형 관람석 디스플레이는 패션에 친숙한 MZ세대에게 즉각적인 반응을 낳는다. ‘소셜심’(2020)은 팬데믹 시기에 유럽에서 벌어지는 각종 시위와 이에 대처하는 경찰을 다뤘다. 팬데믹으로 인해 경찰 역할을 할 모델들을 구할 수 없자 작가는 진압 경찰 아바타를 활용했다. ㅁ자로 둘러싸인 전시장에서 헐크 같은 진압경찰 아바타가 저벅거리며 춤추고 진압하는 모습은 가상의 메타버스 안에서 전시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프랑스 패션업체 발레시아가가 인터넷 '밈'을 활용해 성장 전략을 펴는 현실을 꼬집은 '미션 완료: 발렌사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의 주문 제작(커미션)을 받은 작품도 처음 공개됐다. ‘야성적 충동’이라는 이 작품은 코로나 이후의 대안 경제체제를 제안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스토리는 양치기 리얼리티 TV 쇼를 제작하기 위해 스페인의 한 마을에 온 TV제작진이 코로나가 터지자 기존 계획을 180도 수정하고 ‘크립토 콜로세움’이라는 동물 전투 게임 메타버스를 제작한 것에서 시작한다. 동물이 불에 타 죽으면 비트코인이 발행되는데 이런 탐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시스템에 대항해 발효식품인 치즈 코인이 발행되는 등 대안 경제, 공유경제를 제안한다.

NFT와 연동된 야성적 자본주의 시장을 비판하는 '야성적 충동'. 국립현대미술관·

작품 제목은 영국 경제학자 케인스가 인간의 비이성적 심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야성적 충동’이라고 명명한 데서 땄다. 오늘날 비트코인, NFT 등과 연동된 시장 역시 탐욕과 두려움으로 인해 시장이 통제 불능으로 미쳐 날뛰는 ‘야생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영상은 산악 지역의 양치기와 양 떼 등 목가적인 장면이 나오는 다큐멘터리적 요소, 탐욕의 상징처럼 늑대의 탈을 쓴 케인즈 아바타가 나오는 연극적 요소, 우유가 치즈가 되는 상징적 요소, 동굴 벽화라는 회화적 요소 등이 버무려져 지루한 줄 모른다.

‘안 보여주기: 빌어먹게 유익하고 교육적인 .MOV파일’(2013)은 오프라인에선 CCTV에 의해, 온라인에선 데이터의 흔적에 의해 끊임없이 개인 정보가 노출되는 디지털 기반의 감시사회에서 자신을 숨기는 방법을 유머러스하게 제시한다. 카메라에 안 보이는 방법, 사라짐으로써 안 보이는 방법 등이 있다. 특히 사라짐으로써 안 보이게 하는 방법으로 불량 화소 되기, 무등록자 되기, 필터에 걸린 스팸 되기 등이 언급된다. 하지만 스스로 숨기 이전에 이미 권력과 자본이 만든 알고리즘에 의해 통제되고 은폐되는 존재들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역설적으로 고발한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 부유한 성인 남성(시민)의 말만 발언이 되고 여성과 노예의 말은 잡음이 됐던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모든 전쟁과 기술의 관계, 그 이면에 있는 군산복합체의 이권이 작용하는 현실에 관심이 많다. 이를 작품화한 것이 3채널 영상 ‘타워’(2015)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후세인이 이슬람의 응집을 노리고 바벨탑을 재건하고 싶어했던 상황을 컴퓨터 게임으로 만들었다. 이때 구소련의 컴퓨터과학 중심지였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 있는 3D건축시뮬레이션 회사가 협업했는데 그들은 하르키우의 도시 자체를 3D로 스캔해 이 게임의 배경 이미지로 썼다. 무기를 쏘는 슈팅 게임이 진행되며 파괴된 도시, 탱크와 피난민이 등장하는 상황이 8년이 지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현실이 된 것은 아이러니다. 50대 후반인데도 아버지가 공학자라 기술에 대한 지식이 의복처럼 자연스러워서 구현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영상 작품에는 전반적으로 재난과 역병의 시대에 미술관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담겼다. 저서 ‘면세 미술~’은 미술관이 면세점처럼 자신의 의무(세금)를 다하지 않는 것 아닌가 질문한다.

아시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인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지금까지 제작한 약 40점의 작품 가운데 무려 23점이 선보이는 등 물량이 어마어마하다. 작가도 제대로 보려면 하루에 3점만 보길 권했다고 한다. 여러 번 봐야 할 전시다. 9월 18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