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구청민주주의가 꽃 피었다

입력 2022-06-10 04:08

대학 입학으로 상경한 이후 구청을 찾아가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첫 해외여행 때 여권을 신청하러 갔고, 아버지 차를 받은 뒤엔 자동차 등록증을 발급받으러 갔던 정도만 생각난다. 가끔 주차위반 ‘딱지’를 뗐을 때 구시렁거렸던 기억은 있다. 최근 구청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누가 뭐래도 코로나19 때문일 것이다. 의심 증상이 생기면 우린 구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았다. 혹시 가족에게 옮길까 봐 구청이 제공한 안심 숙소를 찾았다. 답답한 마음에 산책에 나선 이들을 위해 구청은 동네 공원을 재정비했다. 서울 금천구는 자가검진키트 구입비 지원용으로 전 구민에게 5만원씩 지급하는 ‘보편 복지’까지 감행했다. 6000원이 부담스러웠던 저소득층에겐 웬만한 손실보상금만큼 고마운 돈이었을 거다. 코로나는 주민에게 구청의 존재를 각인시킨 절대적인 전환점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면 구청의 흔적이 거리 곳곳에 묻어 있다. 횡단보도 진입 인도에 바닥 신호등을 깐 스마트 횡단보도는 내내 스마트폰만 보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코로나 탓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운 임산부를 위한 ‘아이맘택시’도 있다. 24개월 이하 자녀를 둔 가정까지 사용할 수 있는데 이런저런 짐들을 챙겨야 하는 점을 고려해 대형 카니발로 전용 택시를 만들었다. 이런 시설이 우리 집 주변엔 없다면? 구청에 전화를 한 통씩 하자.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모든 구청이 주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많은 건의사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아예 자신의 전화번호를 공개한 구청장도 있으니 직통으로 문자를 남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는 휴대전화 문자 민원을 빠짐없이 직원에게 전달하고 결과를 보고 받아 회신한다고 한다.

지난 지방선거에선 작지만 큰 이변이 있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전체 425개 행정동에서 모두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눌렀는데 구청장은 25곳 중 8곳에서 민주당 후보가 이긴 것이다. 민주당이 몽땅 민심을 잃어 일방적인 결과를 예상한 사람이 많았는데 놀라운 반전이었다. 강북·관악·금천·노원·성동·성북·은평·중랑구에서 민주당이 이겼다. 이순희 강북구청장 당선인만 삼수 끝에 당선된 초선이고 나머지는 재선과 3선에 성공했다.

민주당 텃밭 덕에 이긴 것이라 폄훼할 필요는 없겠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민주당이 미운 사람을 꼽으라면 이들일 것이다. 민주당 구청장 후보들이 송 후보에게 ‘우리 지역엔 지원 올 필요가 없다’고 손사래를 칠 정도로 이번 선거는 반민주당 여론에 좌우됐던 선거였다.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모두가 도시재생 사업 늪에 빠져 망해갈 때 핫플레이스인 붉은 벽돌 거리를 탄생시키며 성수동 재생사업에 성공했다. 상대 당 오 시장을 설득해 삼표레미콘 부지 철거도 확정했다. 박준희 관악구청장은 상상 속에만 머물던 서울대와의 벤처 협업 깃발을 꽂았고, 서울의 가장 낙후된 지역인 중랑구 류경기 구청장은 서울주택도시공사(SH) 본사 이전, 상봉터미널 부지 복합개발을 추진하며 반전 발판을 만들었다.

대통령선거는 가치 투표지만 구청장 선거는 우리 동네 발전을 위한 실리 투표다. 이들의 승리는 지난 임기 동안 보여준 행정에 대한 보상이다. 시민이 ‘줄투표’ 대신 사람을 보고 찍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조국·추미애가 밀었던 최민희 남양주시장 후보,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측근인 강맹훈 성동구청장 후보가 낙선한 것도 이런 흐름의 일환이다. 어쩌면 구청장 선거를 중앙정치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만 여기던 시대가 지나가는 걸 수도 있겠다. 구청민주주의가 활짝 피어났으면 한다.

강준구 사회2부 차장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