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서 하는 투표·팬덤에 휘둘리는 정당… 한국과 닮은 미국정치

입력 2022-06-09 19:56

미국 정치에서 뭔가가 변했다. 워싱턴포스트 정치기자 출신으로 온라인 매체 ‘복스’(Vox)를 공동 창업한 에즈라 클라인의 책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는 여기서 출발한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많은 미국인이 막연하게 느낀 감각이다.

뭐가 변했을까. 미국 정치는 이전보다 훨씬 유독해졌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념적 차이가 크게 벌어졌고, 상대에 매우 적대적으로 변했다. 2000년대 이전만 해도 미국 정치는 상대적으로 온건했다. 민주당은 진보주의, 공화당은 보수주의로 명확히 분류되지 않았다. 두 정당 사이에 모호한 영역이 있었고 상호 교차가 일어났다. 중도층이 선거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믿음이 통용됐다.

지금은 두 정당이 이념과 정책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지지자들의 구분도 분명하다. 두 정당 지지자 사이에 인종적 차이가 선명하고 성·연령 차이도 분명하다. 서로 종교가 다르고 사는 곳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대통령 선거 전략은 무당파, 결심이 서지 않은 유권자, 부동층을 설득하는 것보다 지지 기반 동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트럼프의 승리는 지지층 결집이 선거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걸 보여줬다.

저자는 이 변화를 ‘정치의 양극화’로 정리하고,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정체성’이란 심리학적 개념을 동원한다. 정당의 분류, 지지자들의 분류가 분명해지면서 ‘어느 당을 지지하느냐’는 정치적 정체성이 개인이 가진 여러 정체성 중 가장 중요한 ‘메가 정체성’이 됐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투표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표현하는 수단이 됐고, 정치는 정체성 대결의 장으로 변모했다.

정치를 정체성 문제로 바라보면 ‘우리’와 ‘그들’이 나뉜다. 타협이나 거래, 절충 등은 배신이 된다. 온건이나 중도는 설 곳이 없어지고 제3의 정치세력은 고사한다. 정체성 정치는 ‘그들’을 적으로 상정할 때 가장 열렬히 표출된다. 그 때 ‘우리’는 정책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상대는 안 된다는 열정으로 뭉친다.

“당신이 한 후보자에게 투표할 때, 당신은 그 후보에게만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상대편의 당선을 막으려고 당신 편에 투표한다. 당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투표한다.… 당신이 속한 집단이 옳고 다른 집단은 틀렸다고 말하기 위해 투표한다.”

이런 분석은 사상 최악의 비호감 선거라는 지난 한국 대선이 왜 그렇게 치열했는지 이해하는 데 힌트가 된다. 또 “좌파 진영에서 오랫동안 고민해온 현상, 왜 노동자 계층이 공화당을 지지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익이 문제가 아니다. 정책도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건 우리 편이냐 아니냐다.

정체성이 지배하는 정치는 강성 지지자를 양산하고 정당 정치를 약화시킨다. 저자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당파성은 강하지만 정당은 약한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같은 후보가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약한 정당’과 ‘강한 당원’ 때문이다. 정치 참여자들은 후보의 여러 자질 중 정체성을 가장 중시하며, 후보자는 표를 모으고 자금을 모으기 위해 정체성에 더욱 매달린다. 미디어도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정체성 정치에 영합한다. 이게 ‘팬덤 정치’의 구조다.

이 책이 제시하는 정체성이란 개념이 다소 모호한 부분도 있지만, 지금 한국 정치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 유용해 보인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