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현충사를 처음 방문한 것은 중학교 수학여행 때였다. 현충사의 상징과 같은 홍살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충무공 영정 앞에서 단체로 묵념을 했다. 어딜 가나 말썽만 부리던 사춘기 중학생들도 그때만은 엄숙했다. 충무공 이순신은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한 민족의 영웅이었다. 현충사는 어린 마음에도 함부로 까불고 장난칠 수 없는 위엄이 서린 공간이었다.
후일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로 홍살문과 현충사 모두 새로 지었음을 알게 된 뒤로는 감흥이 사라졌다. 콘크리트로 급조한, 독재정권의 유물이라는 인식만 남았다. 20여년이 지나 다시 방문했을 때 경내 한쪽에 있는 옛 현충사도 찾았지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진 않았다.
문화재청이 최근 국가등록문화재 등록을 예고하면서 1930년대 초반 현충사 중건 당시의 성금편지를 공개했다. 작고 초라해 보이는 옛 현충사야말로 국내외 동포들이 힘겹게 번 돈으로, 밥을 굶어 아낀 한 홉의 쌀로 탄생한 민족저항 정신의 집약체였다.
조선 숙종 때인 1706년 세워졌지만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진 현충사 중건의 계기는 1931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2000원 빚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의 묘소 위토’라는 기사였다. 정인보 선생은 이튿날 ‘민족적 수치’라는 사설을 싣고 “그의 위토와 묘소가 채귀(債鬼)의 손으로 전전한다 하니 수치도 한걸음 넘어 민족적 범죄라고 할 것이 아니냐”며 동참을 호소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성금이 답지했다. 이듬해 3월까지 400여 단체, 2만여명이 동참해 1만6021원30전이 모였다. 빚을 갚고도 남을 큰돈이었다.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 여파로 97년 외환위기에 비견될 정도로 경제 상황이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적이었다.
문화재청이 공개한 성금편지에 이런 사정이 잘 드러난다. “불행히도 남의 나라에 사는 신세지만 항상 조국의 거리를 생각해 왔습니다.… 밥을 지을 때마다 쌀을 한 홉씩 덜어 이를 판 돈 50전을 보내오니, 땅을 지킬 수 있기를 천만번 비나이다.” “하루 노동해서 번 돈과 하루 점심값을 모은 돈 8원90전을 보내드리니 받아서 보존비로 보태 쓰시기를 바랍니다.” “저희들은 시운이 부재하고 명도가 기궁하여 이역에서 노동을 합니다. 불경기 시국에 어찌 여유가 있겠습니까. 5일간을 기념적으로 동맹금연하고 사소한 금전이나마 작은 도움을 올립니다.”
술집 여성이 성금을 보내왔다는 기록도 있다. “자기 몸의 자유를 잃고 수년 동안 남의 집에 작부로 지내면서 이충무공의 묘소가 불운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피 끓는 가슴과 눈물겨운 의분으로 성금 50전을 보내왔다.” 이렇게 모인 정성으로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과 영정봉안식이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3만여명이 찾아왔는데, 당시 교통과 통신 사정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황이었다.
이후 주목받지 못했던 현충사 중건운동은 2012년 이충무공 고택의 목함에 있는 성금편지와 관련 기록이 발견되면서 다시 빛을 봤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저변에 흐르는 저항과 독립의 정신을 생생히 보여주는 동시에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의 역사적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는 누리집에 이들 자료를 공개하고 ‘이충무공 유적 보존 민족성금 후손 찾기 운동’을 시작했다. 후손으로 확인되면 문화재청장 명의의 감사패를 전달하고 현충사 중건 90주년 문화행사에도 초청할 계획이다. 선조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겠다는 취지도 바람직하지만 교과서 속 역사를 오늘날 우리의 삶으로 이어줌으로써 ‘살아있는 역사’를 일깨운다는 점도 뜻깊다.
송세영 문화체육부장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