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유엔 중심의 자유 세계 일원… 혼자 아니야”

입력 2022-06-16 03:06
1950년 6월 18일 38선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존 포스터 덜레스(가운데) 당시 미국 국무장관과 한·미 장교들. 미국 국립고문서보관소

한국전쟁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한국에 별 관심이 없던 미국이 어떻게 6·25전쟁이 발발하자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했는가 하는 것이다.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미 내셔널클럽에서 행한 ‘아시아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중국과 일본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대신, 한국에 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애치슨은 당시 중국 본토를 모택동이 장악하고 있지만 결국 모택동은 미국과 손을 잡게 될 것이라고 암시했다. 그러나 애치슨의 전망은 빗나갔다. 또한 애치슨은 일본과 태평양지역에 대한 미국의 방어를 약속하면서 알류샨열도, 일본 그리고 오키나와, 필리핀 등을 방어거점 지역(defense perimeter)으로 삼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애치슨라인으로 잘못 알려졌다.

그러면 한국을 포함한 그 외의 지역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애치슨은 기타지역 방위는 기본적으로 해당 국민의 몫이며, 유엔의 책임 아래 있다고 봤다. 만일 북한이 소련과 중공의 도움을 받아 남한을 침략할 경우 미국은 유엔의 이름 아래 참전할 수 있으나 소련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런 애치슨의 발언은 남한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이승만은 주미대사 장면에게 남한을 미국의 방어지역에 포함해 달라고 요청하라고 했다. 애치슨은 5월 초 미국은 남한에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유엔의 협력 아래 거의 전 세계가 승인한 독립국을 수립했으며 여기에서 미국이 물러난다는 것은 “최악의 패배주의이자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방어를 구체적으로 약속하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 내에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 있었다. 미 국무부 고문으로 있던 존 포스터 덜레스였다. 할아버지는 선교사였고, 아버지는 목사였던 덜레스는 독실한 장로교 장로로서 미국의 대표적 기독교 정치인이었다. 공산주의 위협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아시아 국가들을 공산주의 위협에서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애치슨의 발언으로 미국에 대해 의심하던 한국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덜레스를 한국에 특사로 파견했다.

덜레스를 기념한 워싱턴DC의 덜레스국제공항 전경. 미국 국립고문서보관소

덜레스는 한국에 오기 전 애치슨 연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국무부와 함께 유사시 미국은 유엔과 협의해서 한국을 지키겠다는 새로운 문서를 작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유엔 이름으로 국제사회를 이끌어 가려고 했다. 덜레스는 유엔 헌장의 초안자 가운데 하나였다. 1948년 유엔에서 미국 대표로서 한국의 승인을 위해 주도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덜레스는 유엔이 한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승인했기 때문에 한국이 공격을 받으면 이것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봤다.

덜레스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50년 6월 17일 토요일이었다. 이승만과 온 국민은 열렬히 그를 환영했다. 이승만과 덜레스는 프린스턴대학교 동문이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덜레스는 사람들에게 이승만을 자신의 종교 때문에 많은 희생을 당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일요일인 다음 날, 덜레스는 의정부에 가서 남한이 얼마나 위험에 처해있는지를 봤다. 그날 저녁 덜레스는 장로교 선교사들의 초청을 받아 식사하면서 한국 상황을 들었다. 그리고 당시 건축 중이었던 영락교회에서 열린 피란민 집회에 참여했다. 덜레스는 이곳에서 철저한 신앙과 민주 정신으로 무장한 피란민들을 보게 됐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들을 무력을 사용해 제거하려고 한다고 봤다. 그래서 미국은 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델레스는 생각했다.

6월 19일 덜레스가 한국 국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미국이 영국의 독재에 맞서 독립을 이룬 것을 언급하면서 지금 한국은 공산 독재와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다고 언급했다. 한국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난 2년 동안 두 차례 자유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신장시켰고, 경제구조를 재구성했다고도 칭찬했다. 덜레스는 한국이 유엔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 세계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며, 한국이 자유 세계의 일원으로 남아있는 한 “한국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고 말했다. 미국이 유엔을 통해 한국을 도울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다. 다음 날 덜레스는 서울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남한에서 자유와 교육이 하나가 돼 공산 독재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21일 덜레스는 새로운 미·일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향했다.

덜레스는 6월 25일 도쿄에서 북한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트루먼에게 한국 혼자의 힘으로는 남침을 막을 수 없으며, 소련군의 반격위험이 있다고 해도 미군이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일 한국의 상황을 좌시하면 틀림없이 세계대전으로 발전하는 연쇄작용이 일어날 것”이라고 강조하며 유엔 안보리에 부칠 것을 요청했다.

덜레스의 전보는 미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제기했고, 안보리는 유엔의 이름으로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때가 6월 28일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3일 만에 미국은 국제사회와 함께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고, 그 배후에는 신실한 기독교 정치가 덜레스가 있었다.

박명수 명예교수
서울신대·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