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택시 운전사가 괜찮은 신랑감이던 그 시절

입력 2022-06-08 04:04

내겐 세상 아까운 돈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택시비, 또 하나는 주차비. 둘 모두 편리한 이동을 위한 비용이다. ‘편리한’이라는 수식어를 떼면 얼마든지 아낄 수 있는 돈이다. 누군가는 그러더라. 뭐 하러 매년 자동차세에 보험료 따박따박 내고, 지구온난화 주범인 기름 때고, 주차비는 물론 직접 운전까지 하는 노동을 더해야 하는데 비싼 돈 주고 차까지 사냐고, 그냥 그 돈으로 평생 택시 편하게 불러 타고 다니라고.

생각해보니 귀가 솔깃하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무엇보다 서울엔 주차할 곳이 없다. 일단 막히는 길을 뚫고 목적지까지 가더라도 내 차 한 대 주차할 곳이 없다. 건물 지하 주차장을 뱅글뱅글 돌고 있노라면 약속시간에 강박이 있는 나는 눈물이 날 지경이다. 명을 단축하느니 발을 수고롭게 만드는 걸 선택한 나는 그래서 주로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한다. 그래도 비가 오거나 양손에 짐이 있는 날은 차가 간절하다.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택시가 없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있다. 술에 취해 늦은 밤, 버스도 지하철도 없는, 그 새벽의 귀가 시간.

광고 카피처럼 ‘언제든 부르면 바로 온다’던 택시가 안 온다는 걸 나는 얼마 전에 알았다. 친구 생일 덕분에 오랜만에 다 함께 모인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코로나 때문에 시행됐던 밤 10시 영업제한이 풀리고 얼마 후였다. 저녁식사를 하려고 들어갔던 고깃집도, 맥주 한잔 먹으려고 들어갔던 호프집도 들썩였다. 신데렐라의 마차가 호박으로 변할까 조마조마했던 10시 통금시간이 끝난 우리도 신이 났다.

어정쩡한 시간에 택시 잡으면 골치 아프다는 친구의 말대로 새벽 1시가 조금 넘어 앱을 켜고 택시를 불렀다. 주변의 택시를 호출하는 시간이 10분에서 20분으로, 그리고 30분으로 숫자가 바뀌는 동안에도 ‘다른 택시 부르면 되지’ 했다. 서서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거리로 나온 순간은 이미 늦었다. 광활하게 텅 빈 서울 한남동 4차선 거리를 보니 슬슬 불안감이 밀려왔다. 먼 곳에 사는 친구들부터 택시가 도착하더니 결국 거리가 멀지 않은 시내로 가려는 나만 남았다.

집까지 7㎞. 걸어가볼까. 10㎞도 거뜬히 뛰어다니는데 이까짓 거 못 걸어. 취기가 올라 비틀거리는 발을 내려다보니 하이힐이다. 갑자기 용기가 꺾였다. 그제야 거리의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예약’ 불을 켜고 쏜살같이 내달리는 택시를 향해 하염없이 손을 흔드는 취객, 택시 승차 앱을 들여다보는지 휴대폰에 고개를 묻고 있는 아가씨. 한 줄기 희망의 끈처럼 나도 연신 택시 호출을 누르고 또 눌렀다. 배차가 됐다는 문구가 마치 구원의 메시지 같았다. 뭐든지 없어져 봐야 안다. 그 소중함을.

뉴스에는 연일 ‘그 많던 택시들 어디로 갔나’ ‘1년 새 법인택시 운전기사 30% 줄어’라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업제한 시간이 풀리면서 택시를 타려는 사람은 많은데 택시 운전사가 없다. 언제 끝날지 모를 코로나 보릿고개를 견디다 못한 젊은 운전사 대부분은 조금 더 돈이 되는 배달일을 택해 떠났다. 사실 택시 운전사가 사라지기 시작한 건 오래된 일이다. 믿기나 할까. 택시 운전사가 괜찮은 신랑감이던 그 시절. 1970년대 의사 레지던트 월급이 50만원일 때, 개인택시 열심히 운전하면 비슷하게 벌 수 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돼 버렸지만.

“내가 운전을 시작했던 1973년 당시엔 짜장면값이 180원이었지. 딱 택시 기본요금이었지. 그땐 하루 종일 열심히 운전하면 그래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봐요. 짜장면은 6000원인데 택시는 3800원이야. 택시비가 서민 물가랑 이어지니 늘 억제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운전하는 사람도 좀 먹고살아야 하지 않나. 택시 운전 40년에 남은 건 전셋집 하나랑, 디스크에 치질뿐이네.” 지방 출장길, 기차 시간 늦을까 발을 동동거리다가 간신히 잡아탄 택시의 나이 지긋하신 운전사 푸념에 귀를 기울이는 오늘 아침이다.

최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