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저성장 속 물가 상승을 뜻하는 슬로플레이션(slowflation) 국면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현상이 장기화하면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어 전문가들은 정부와 한국은행이 물가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6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발표된 경제 지표는 경기 회복이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경제 동력을 나타내는 전산업 생산과 소비, 투자는 지난 4월 한꺼번에 하락하는 ‘트리플 감소’를 기록했다. 세 지표의 동반 하락은 코로나19 확산 초기인 2020년 2월 이후 26개월 만이다. 이에 올해 경제 성장률은 2%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획재정부는 이달 중하순 발표할 ‘경제 정책 방향’에서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3.1%(지난해 말 예상)에서 2%대 중후반으로 낮추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반면 물가는 고공 행진 중이다. 지난달 소비자 물가는 전월 대비 5.4% 올라 2008년 8월(5.6%) 이후 상승률이 가장 높았다. 한은은 오는 6·7월에도 5%대의 높은 물가 상승률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유가 흐름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다. 과거 1970년대 중반과 1980년대 초반 한국 경제가 겪었던 두 차례의 스태그플레이션이 석유 파동에 따른 공급 충격에서 비롯돼서다. 지난 3일(현지시간) 서부 텍사스산 원유 가격은 전날 대비 1.7% 오른 배럴당 118.9달러를, 브렌트유는 1.8% 상승한 119.7달러를 기록해 120달러 선에 바짝 다가섰다. 미국계 상업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최근 “러시아 경제 제재가 유가를 배럴당 150달러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예상했다. 유가가 꺾이지 않을 경우 과거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던 상황과 상당히 유사해진다.
다만 이런 상황이 당장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이 최근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한은은 이번 인플레이션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경기 부작용을 우려해 완만한 통화 긴축 정책을 폈던 1970년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최근 유가도 실질 가격 기준으로 1980년의 3분의 2 수준에 불과하다. 같은 해 61%였던 한국 경제의 석유 의존도도 2020년 39%까지 낮아졌다.
장 연구위원은 “정부와 한은은 물가 안정화와 경기 부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 하기보다 인플레이션에 우선 대응해야 한다”면서 “인플레이션 위험 인식을 경제 주체와 공유함으로써 금리 인상 필요성을 이해시키고 이들이 부채를 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인플레이션은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높이는 주요인”이라면서 “한은은 시장과 소통해 민간의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안정화하고 정부는 재정을 효율적으로 집행해 물가 상승 압력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진욱 기자 real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