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교(62)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통상 역사의 산증인이다. 무려 32년간 통상을 연구했다. 1993년에는 농산물 관세 문제를 다룬 우루과이라운드(UR) 최종 협상에 참여했다. 한국 최초의 자유무역협정(FTA)인 한·칠레 FTA 협상 연구도 주도했다. 이후에도 한·미, 한·유럽연합(EU), 한·중 등 굵직한 FTA 관련 경제효과 분석을 도맡다시피 했다. 첨예한 FTA 추진 여부를 두고 여야가 맞붙은 국회에 증인으로 소환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는 최근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지난달 31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한국의 IPEF 참여 선언이 “당연한 수순”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자유 가치를 둔 ‘가치동맹’으로 갈 수밖에 없고, 기술동맹의 의미도 있어서 안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반발에 대해서는 “기업이 실리를 고려해 중국 의존도를 어느 정도 가져갈지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했다. 공급망 불확실성이 키운 인플레이션에는 “오래가지는 못하겠지만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최근 통상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위기라고 한다.
“WTO 근간인 다자주의,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세계화라는 큰 가치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계화가 정말 인류에 좋냐는 의구심이 ‘브렉시트’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 때 강하게 표출됐다. 다자주의를 통해 세계적으로 파이는 커졌는데 분배는 불평등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뿐만 아니라 선진국 국내적으로도 불평등이 심화했다. 이게 세계화 탓 아니냐고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중국이 부상하면서 WTO 체제에서 미국 리더십이 잘 작동하지 않았다. 당분간은 다자주의가 힘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IPEF가 등장한 거 같다. 한국이 IPEF에 참여하는 것은 긍정적인가.
“당연한 순서다. 미국 중심 그룹에 들어갈 거냐, 중국 중심 그룹에 들어갈 거냐 고민하다 결국은 미국 중심으로 갔다고 봐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두 가지 면이 있다. 우선은 ‘가치’다. 중국 중심 구도에 편승했을 때 민주주의 가치나 국가 자존심을 보전할 수 있느냐에 물음표가 붙는다. 민주, 자유의 가치를 봐도 (미국이 말하는) 가치동맹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게 기술동맹 효과도 있다. 한국이 반도체 등 제조업은 강하지만 원천기술은 미국에 있다. 이 동맹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IPEF 협상을 할 때 주의해서 봐야 할 부분이 있나.
“디지털 무역협정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 디지털은 다른 산업에 비해 승자독식 성향이 강하다. 디지털 기술 표준이 정해지는 순간 다른 기술은 표준이 안 될 가능성이 높다. 협상 과정에서 한국 산업 여건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노동유연성 등 미국이 원하는 노동 환경 기준이 한국과 다르다. 이를 신경 써서 봐야 할 것이다.”
-IPEF 참여로 중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주도 글로벌 규범이지만 사실상 중국 빼고 대부분 들어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다만 한국은 수출 시장으로서 중국 의존도가 높다. 비용 대비 인프라만 보면 중국이 제일 좋아 중국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각국이 가령 중국 의존도 90%, 타국 10%로 해오다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90%가 일시적으로 0% 되는 현상을 겪었다. 일시적 단절로 피해를 보는 경험을 한 만큼 이 비중을 최적화하려고 기업이 움직일 거다. 중국 의존도를 어느 정도 가져갈지 산업·기술 관점과 경제 원리를 기반으로 기업이 스스로 정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 언제까지 가나.
“어려운 질문이다. 다만 전쟁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 같다. 국제유가 상승 등도 오래 가기는 힘들다. 연말 정도면 분위기가 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인위적인 불상사로 단절을 겪은 경험을 되새겨야 한다. 코로나19, 자연재해 등.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가 근본적 원인일 수 있다.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니 근본적 변화 필요하다. 어렵겠지만 기후변화 대응하며 탄소 중립 사회로 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니 이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두고 농민 반발이 크다.
“국익 전체로 볼 때 CPTPP 가입해야 한다. CPTPP는 확실한 현금이고 IPEF는 보험이다. 대신 농민 설득 과정을 거쳐야 한다. 쌀 협상 때도 2주에 한 번씩 농민 만나며 설득하니 반대 강도가 누그러졌다. 갈등 비용이 1조원 들어갈 것을 5000억원으로 줄인다면 경제적인 것이다. 얼른 설득 과정 거치고 빨리 가야 한다.”
-한국 통상 실력에 점수를 준다면.
“개인적으로 100점 만점에 90점만 돼도 잘하는 거라고 보는데, 이런 판단에서 보면 한국은 85점을 줄 수 있겠다. 1980년대 말에 UR하면서 본격적으로 통상을 시작했다. 여태까지 보면 잘했고 최근에는 협상 능력도 좋아지고 나름 탄탄한 논리 구조도 갖췄다. 다만 세계적 주요 통상 이슈를 선도하는 모습이 없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또 전문적인 통상 인력 배양도 필요한데 이 역시 물음표가 붙는다. 통상 현안을 총괄할 수 있는 컨트롤 타워가 없는 점도 아쉽다.”
세종=신준섭 권민지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