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사면해 달라는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반도체를 둘러싼 외부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이 부회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 부회장은 재판에 불참하고 유럽 출장길에 오른다.
5일 재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오는 7일부터 18일까지 네덜란드 등을 방문한다. 이 부회장은 지난 2일 재판에서 해외출장으로 재판 참석이 어렵다는 불출석 이유서를 제출했다. 네덜란드로 향하는 건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의 본사가 있기 때문이다. ASML은 초미세 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만드는 유일한 업체다.
최근 EUV 공정을 도입하는 반도체 기업들이 늘면서 장비 쟁탈전은 뜨겁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에 이어 인텔까지 ASML로부터 EUV 장비를 받아서 쓰고 있다. 수요는 증가했는데, 공급은 ASML에서만 하는 탓에 ‘공급난’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인텔은 이미 ASML로부터 차세대 노광기인 ‘하이-NA 노광기’를 업계 최초로 공급받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ASML 경영진을 만나 EUV 노광 장비 공급을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부회장은 독일을 들러 지멘스를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이번 출장으로 인수·합병(M&A) 계획을 보다 구체화할지 주목한다. 네덜란드에는 그동안 삼성전자의 M&A 후보군 중 하나로 꼽혀온 차량용 반도체 기업 NXP, 독일에는 인피니온이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반도체연구소장, 파운드리 제조기술센터장을 새로 선임하는 등 20명가량의 인사를 단행했다. 부사장급 이상만 10여명에 달했다. 반도체연구소 안에 ‘차세대연구실’이라는 새로운 조직도 만들었다. 인사철이 아닌데도 대규모 인사를 한 건 수율 문제 등으로 위축된 내부 분위기를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해석된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서 동분서주하면서 이 부회장 사면 여론도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8월 가석방됐지만 취업 제한 논란으로 경영 활동에서 제약을 받는다. 재계에서 특별 사면을 요구하는 이유다.
이찬희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3일 개인 의견이라는 걸 전제로 사면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 위원장은 “글로벌 기업인 삼성의 최고경영진이 재판 때문에 제대로 경영할 수 없다면 결국 국민이 피해를 보는 것”이라며 “그래서 국민의 뜻에 따라서 결단을 내려주셨으면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앞서, 6명의 경제단체장과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만난 자리에서도 이 부회장 등에 대한 사면이 거론됐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기업인들이 세계 시장에서 더 활발히 뛸 수 있도록, 현재 해외 출입국에 제약받는 등의 기업활동에 불편 겪고 있는 이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같은 기업인의 사면을 적극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재계의 사면 요청에 정치권이 호응할지 미지수다. 시기로만 보면 빨라도 8월 15일 광복절에야 특별사면이 이뤄질 수 있다. 그때까지 국민적 공감대 형성, 시민단체 등의 반대 여론 설득 같은 ‘넘어야 할 산’도 많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삼성 등의 주요 그룹이 발표한 대규모 투자계획이 제대로 진행되려면 어느 때보다 총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