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로 결정하지. 손들어 보자고.” 최선의 민주주의 방법처럼 여겨지는 다수결 원칙은 정치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등장한다. 심지어 ‘오늘 점심 뭘 먹지’를 결정할 때도.
공공분쟁 조정 전문가인 로런스 서스킨드 MIT 교수는 저서 ‘다수가 옳다는 착각’에서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정수라는 믿음을 버리라고 주장한다. 이해관계가 대립할 때 합의에 이르는 길이 다수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로버트 규칙’으로 불리는 다수결 원칙은 1876년 미국의 헨리 마틴 로버트 육군 공병 장군이 발표한 것이다. 남북전쟁을 겪은 뒤 이견과 반목이 팽배한 상황에서 제시한 최소한의 회의 규칙이 150년 가까이 절대적 권위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서스킨드 교수는 다수결이 의사결정의 기본원칙이 될 때 소수의 권리를 묵살하게 되고, 명확한 결론을 추구하다가 좋은 결론을 놓치게 된다고 지적한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상황은 지속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수파가 밀어붙인 의제들이 다시 뒤집히는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다수파는 종종 폭주 본능에 사로잡히곤 한다. 18대 국회에서는 가장 큰 표 차로 당선된 대통령과 대선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국회 다수파가 된 여당의 입법 폭주, 그리고 그것을 몸으로 막겠다고 나선 야당 간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거기엔 민주적인 대화, 동의와 설득은 없었다. 이후 이른바 ‘몸싸움 방지법’으로 불리는 국회 선진화법이 만들어졌지만 다수파는 여전히 대화와 토론을 표결로 종결짓는 쪽을 선택하곤 했다. 선진화법은 몸싸움만 막았지 다수의 폭주는 막을 수 없었다.
‘동물 국회’라 불렸던 그 18대 국회에서도 소수 야당 국회의원이던 필자가 발의한 두 개의 제정법이 통과됐고, 여야 간 날카로운 대립을 벌인 법 개정도 이뤄졌다. 그러나 필자의 능력으로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18대 국회 초기인 2008년 12월 소송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법안을 발의했다. 재판 절차를 뛰어넘는 특별법이어서 법원의 동의를 받아야 했고, 다수 여당의 관문이 남아 있었다. 민생 문제이니 여야 없이 합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법이 통과돼 시행되기까지 3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야당이 먼저 제기한 의제에 대해 여당은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입법의 주도권을 누가 가졌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막힌 물꼬를 터준 건 여당의 A의원이었다. 입법 취지에 공감한 그 의원이 여당을 설득했고, 여당 의원들이 유사한 법안을 발의해서 상임위원회 대안으로 법을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주도권 문제를 해소했다. 누구의, 어느 당의 성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A의원은 여야 간 가치 논쟁의 소지가 있어 민감한 이슈가 됐던 국가유공자법 개정에도 도움을 주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된 것도 2011년의 일이다. 악의적이고 반복적인 불공정 행위를 예방하기 위한 입법이라는 야당의 제안은 기업에 대한 과도한 규제라는 여당 주장에 막혀 팽팽하게 대립했다. 몇 년간 계속된 논쟁 속에서도 아무런 의사표시를 하지 않던 여당의 B의원이 어느 날 “그거 합시다. 해봅시다”라고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흐름이 바뀌었다. 영원히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대립상황에서 한 사람이라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할 수 있다면 그때가 시작이다.
20여년간 협치에 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누구나 협치를 말하지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합의점을 만들어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 없이, 협치는 그저 듣기 좋은 말에 불과하다. 다수의 폭주는 흔히 여론의 역풍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어제 다수를 만들어준 민심이 오늘 다수의 폭주를 보면서 ‘우리가 위임한 건 그게 아니다’라고 꾸짖는 것이다. 그때가 바로 ‘다수가 옳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시간이다. 선거가 끝난 뒤에만 ‘민심이 무섭다’고 말하는 정치로는 영원히 도돌이표일 뿐이다.
협치는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반대편에도 분명히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결코 통하지 않을 것 같던 입장차이가 좁혀지기도 한다. 다수결로 서둘러 논의를 종결하는 대신 대화와 설득, 동의를 구하기 위한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더욱이 오늘 점심 뭐 먹을지 결정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박선숙 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