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그때가 지금보다 좋았다

입력 2022-06-06 04:07

2002 한·일 월드컵이 열린 지 벌써 20년이나 됐다. 요즘 한·일 관계와 여론을 보면 지금 두 나라가 월드컵을 공동 개최한다는 건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20년 전에는 그게 가능했다. 유치전 당시 한국은 후발 추격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공동 개최라는 타협안을 관철시킨 것 자체가 대단한 성취였다. 한·일 월드컵에 대해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는 “한국과 일본이 협력함으로써 국제사회에 대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했다는 ‘성공 체험’을 거뒀다”고 평가했다. 다만 “서로의 경쟁의식이 한층 더 거세짐에 따라 이후의 한·일 대립에 씨를 뿌리게 됐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돌이켜 보면 당시 두 나라가 무언가를 함께 이뤄냈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일본은 16강, 한국은 4강 진출이란 성적에서 보듯 우리가 압도적으로 잘했다는 성취감만 있었다. 그런 면에선 경쟁의식을 더욱 부추겨 이후 갈등의 시발점이 됐다는 해석은 타당하다.

최근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은 “제 영화에는 중국인 배우(탕웨이)가 나오고,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브로커’는 일본 감독(고레에다 히로카즈)이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며 “아시아의 인적 자원과 자본이 교류하는 건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중·일 3국의 영화인들이 함께 힘을 모아 영화를 만들고, 그 영화로 유럽 최고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건 흐뭇한 광경이다. 지금 그다지 좋지 못한 세 나라의 관계 속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기에 더욱 반가운 것일 테다.

한·일, 한·중 사이 문제 해결에 관한 인사이트를 얻어 보려고 두 권의 책을 펴 봤다. 기미야 교수가 쓴 ‘한일관계사’와 오드 아르네 베스타 예일대 교수가 한·중 관계 600년사를 개괄한 ‘제국과 의로운 민족’이다. 물론 두 책은 뾰족한 해법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그런 게 있다면 모든 문제가 진즉에 해결됐을 것이다. 한국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두 책이 비슷한 부분이 있다. 한반도가 단 한 번도 중국 제국의 일부가 되지 않은 방법과 이유에 천착한 베스타 교수는 한반도인의 뚜렷한 정체성과 중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점을 그 비결로 꼽았다. 기미야 교수는 “한국은 대국에 농락당하며 우왕좌왕하는 허약한 나라가 아니라 대국 관계의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씩씩하게 살아남는 나라”라고 했다. 지금까지 기민한 ‘외교의 힘’으로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그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기미야 교수는 비대칭적이던 한·일 관계가 대칭적으로 바뀌었는데, 즉 한쪽이 우위에 있다가 이젠 비등해졌는데, 양국 정부와 사회가 이런 변화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본에선 한국을 한 단계 밑으로 보는 사고가 남아 있으면서도 한국이 약속을 안 지키는 걸 선진국답지 못하다고 비난하고, 반대로 한국에선 예전 일본의 관대함을 계속 기대하면서 일본의 역사인식이 선진국답지 못하다고 때린다. 대칭적·경쟁적으로 바뀐 관계에 적응하도록 양측 모두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다. 베스타 교수는 한국보다는 중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그는 “지금까지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며 “남한을 향한 고압적인 자세와 북한의 변화를 내켜 하지 않는 태도는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중국은 점점 신뢰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고 있어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엔 한국에서 중국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비율이 66%에 달했다고 한다. 한·중·일은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좋았었나 보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