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국회의원 보증기간

입력 2022-06-06 04:08

윤창호법이 만들어진 지 4년 만에 사실상 폐기처분됐다. 헌법재판소가 반복된 음주운전과 음주 측정 거부를 가중 처벌 하는 법 조항에 7개월 사이 잇달아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다. 윤창호법은 2018년 음주운전 사고로 숨진 고인의 이름을 따 만들어졌다. 분노한 여론이 들끓자 국회의원들은 석 달 만에 일사천리로 법을 처리했다. 하지만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윤창호법은 하루아침에 효력을 상실했다.

윤창호법에도 기회는 있었다. 지난해 11월 헌재는 ‘2회 이상 음주운전’을 강하게 처벌하는 법 조항에 대해 위헌 판단을 내렸다. 이를 보며 국회가 곧 애프터서비스(AS)에 나설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다수 재판관은 재범에 일종의 유효기간을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도 등 다른 범죄는 재범을 가중 처벌 하는 기준이 통상 3년이다. 윤창호법엔 이 기준이 따로 없다. 10년이든 20년이든 과거 전력만 있으면 무조건 가중 처벌한다. 헌재는 이 부분이 다른 법에 비해 과도하고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국회가 합리적인 재범 기준을 논의해 법을 고친다면 합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국회는 반년 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난달 26일 나머지 윤창호법 조항에도 위헌 결정이 나왔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예방책과 처벌 방안이 고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상황으로 모두 되돌아왔다. 이젠 반복된 음주운전도 종전처럼 일반 도로교통법 기준으로 처벌된다. 그간 윤창호법으로 처벌된 사람은 모두 재심을 받는다. 최근 한 젊은 연예인이 음주운전 사고를 일으켜 사회적 논란에 휩싸였지만 음주운전 방지 장치 도입 논의 등은 아직도 지지부진하다. 하긴 여야를 불문하고 음주운전 전과자가 당당하게 선거 공천을 받는 판국에서 정치권에 음주운전 대책을 기대한 것이 잘못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윤창호법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얼렁뚱땅 법을 만들고 나 몰라라 해 벌어지는 부작용이 더 큰 문제다. 최근 국회 다수당은 법 하나 고치는 게 얼마나 빠르고 쉬운 지 제대로 보여줬다. 더불어민주당은 ‘검수완박’ 법안을 지난 4월 당론 채택한 뒤 3주 만에 처리했다. 법조·시민단체 반발에도 강행된 이 법은 당장 3개월 뒤 시행된다. 수사 현장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후속 조치가 절실한데, 정작 핏대를 세우던 사람들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그머니 손을 놔버렸다. 6·1 지방선거의 주요 패착 요인으로 검수완박이 꼽히자 언급조차 꺼리는 모습이다.

요즘은 웬만한 물건을 사도 최소한의 보증 기간이 있는 시대다. 국회엔 이 기준이 없다. 일단 법을 만들고 문제가 있으면 고치겠다고 해 놓은 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2020년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도 그랬다. 시행 1년 동안 수사 지연 사례가 늘어나는 등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국회의 AS는 없었다. 오히려 그 위에 검수완박 법안을 끼얹었다. 졸속 추진된 임대차 3법은 4년 치 시세가 한꺼번에 반영되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지만 이 역시 나서서 고치겠다는 다수당 의원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 법이든 만들어 놓고는 ‘우리 일했으니 칭찬해 달라’고 하면 되는 시대는 지났다. 소비자도 국민도 모두 똑똑해졌다. TV·냉장고 같은 고가품부터 비교적 값싼 제품도 사후 처리가 엉터리면 다신 사지 않는다. 법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다. 한번 잘못 만들면 행정부와 사법부가 모두 꼬이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사고 당시 22세이던 윤창호씨는 대학에 다니며 법조인을 꿈꿨다. 카투사 복무 중 휴가를 나왔다가 참변을 당했다. 꽃다운 청춘의 희생에도 우리 사회는 결과적으로 아무런 변화도 끌어내지 못했다. 정치권은 뒷짐만 지고 있다. 일단 물건부터 팔고 나 몰라라 하는 행태가 반복된다면 국민은 표로 심판할 것이다. TV는 한번 사면 10년은 써야 하지만 국회의원은 4년마다 바꿀 수 있다.

양민철 사회부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