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주름진 어르신 손 잡고 중보하는 ‘동네 목사’

입력 2022-06-06 03:04
신몽연 목사가 지난 2일 전북 전주시 평화동 월광교회 예배당 입구에 서 있다. 그는 “목회의 본질은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회 앞은 푸르고 울창한 산이었다. 그 아래로 맑은 물줄기가 가늘게 흐르고 있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시(市)이지만, 산 하나만 넘으면 고요한 농촌이 제 할 일을 하는 동네였다.

“매일 커피 마시죠? 오늘은 이걸 마셔 봐요.”

지난 2일 전북 전주시 평화동 전주월광교회에서 만난 신몽연(61·전주월광교회) 목사는 홍삼차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예배당 옆 식당 선반엔 쑥 구름버섯 은행열매 같은 말린 식물이 종류별로 뭉쳐 있었다. 수시로 성도들과 나누는 거라고 했다.

신 목사는 “문 밖을 나서면 진귀한 약초가 한가득이다. 여기는 전주에서도 개발이 안 된 데라 청정지역에 가깝다”며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영성과 그에 따른 실천이지 여기서 목회한다고 (다른 데와) 차이를 느끼진 않는다”고 말했다. 시스템이 잘 갖춰진 다른 교회와 비교할 게 없다는 것이다. 신 목사는 인터뷰 내내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는 일이 목회의 본질임을 강조했다.

전남 여수에서 나고 자란 신 목사는 신대원 진학(한일장신대)을 계기로 이 지역에 터를 잡았다. 낮에는 영어 강사로 일하며 학업을 병행하는 사이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언제나 시간이 모자랐다. 매일 저녁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서둘러 김밥을 먹었고, 밤마다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가며 신학 책을 넘겼다. 주말엔 밀린 집안일과 교회 사역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대대로 천주교 집안이었던 시댁과 불화를 겪기도 했다. 신 목사는 “그 시절 엄마들은 다 그랬다”면서도 “이제는 교회에서도 앞서 했던 말이 이상하게 들려야 한다. 목회자 워킹맘이 사역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각 교단에서 돌봄 체계를 신경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신 목사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돌봄사역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가 사는 전북 지역은 청년 유출과 인구 감소로 노인 비율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그는 2006년 초 호스피스 병원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아기 울음 소리가 가물거리는 곳에서도 삶의 마지막 길목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 자체로 보람찼다”며 “십자가 위에서 강도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2년 반쯤 지나서는 사역지를 요양병원 원목으로 옮겼다. 이미 많은 교회가 요양원 주간보호센터 방문요양센터 등 돌봄시설을 만들어 지역 내 고령층을 포용하는 상황이었다.

신 목사는 반복되는 시설 생활에 무료해질 이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지 고민했다. 직원들과 머리를 맞댔다. 그림그리기 유적지탐방 음악치료 같은 여러 프로그램에 동참했다. 생일잔치 때 활짝 웃는 어르신을 보면서 피로를 씻기도 했지만, 어떤 어르신의 수심 가득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는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어느 시설이든 매뉴얼과 프로그램에 맞춰 돌아갑니다. 말하자면 필요조건인 셈입니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다양해도, 결국 어르신들이 하나님을 찾도록 이끄는 게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그들의 정서를 안정시킬 뿐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지지를 느낄 수 있게끔 어루만져 줘야 해요. 그러려면 제가 어르신 한 분 한 분에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르신이 주님의 임재를 체험케 하는 과정엔 별다른 기술이 요구되지 않았다. 그저 거칠고 주름진 손을 잡고 전심으로 중보하는 것뿐이었다. 신 목사는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사 46:4)는 말씀처럼, 어르신이 하나님 품을 경험하게 해야 그들이 하늘나라의 소망을 기대하게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현재 신 목사는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한 교회에서 10년째 담임목사로 사역 중이다. 전임 목사가 교회 돈을 빼돌려 달아난 곳이었다. 당시 빚은 5000만원이었다. 10년 전 신 목사는 성도들과 집기들로 어질러진 조립식 건물을 말끔히 정리했다. 그리고 매달 다 함께 차근차근 부채를 갚아 나갔다.

그러다 유방암에 걸렸다. 네 차례나 이어진 수술은 그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아들에게 차라리 안락사를 시켜 달라고 호소하는가 하면, 가발을 쓰고 평소보다 두껍게 화장을 한 채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본’을 상기시켜 준 기회”였다고 고백했다.

“우리 여자들은 아프면 돌봐 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럴 때 교회에 오면 밥도 먹을 수 있고, 위로와 쉼을 얻을 수 있지요. 저는 특별할 것 없는 동네 목사입니다. 그런 평범한 사람이 건네는 양식 안에 하나님 말씀도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허기가 채워지는 시간 속에 하나님께서 문을 두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월광교회 식당의 낡은 싱크대는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 있었다. 어머니의 오랜 부엌처럼 푸근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스며 있었다. 그는 “남은 사역 기간 동안 내 상황에서 만나는 하나님과 교인들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고 말했다.

전주=글·사진 박이삭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