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8세였던 구동독 출신의 안드레아 거스키(67)가 파리 몽파르나스의 아파트를 찍은 사진 작품 ‘파리, 몽파르나스’가 발표됐을 때 세계 미술계는 깜짝 놀랐다. 세로 2미터, 가로 4미터의 거대한 크기는 아날로그 사진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거스키는 어떤 마법을 부린 걸까. 그는 한 해 전부터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컴퓨터로 스캔해 편집하는 디지털 포스트프로덕션 과정을 사용했고 그 첫 시도로 이 작품을 선보였다. 몽파르나스 아파트 길 건너에 카메라를 설치해 몇 개의 이미지로 나눠 촬영한 뒤, 디지털 편집 기술을 사용해 감쪽같이 이어붙임으로써 한 번에 찍은 것 같은 효과를 냈다.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은 1980년대부터 보급됐지만, 이를 사진 작업에 적용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 작품으로 마흔도 안돼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된 거스키는 예술가로서 승승장구했다. 2001년 현대미술의 심장인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사진계의 거장이 됐다. 지난달 20세기 미국 사진작가 만 레이(1890∼1976)에게 타이틀을 뺏기기 전까지만 해도 작품값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사진작가로 군림했다.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국내 최초로 안드레아스 거스키 개인전을 하고 있다.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키운 ‘파리, 몽파르나스’부터 유화로 그린 거대한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최근작까지 작품세계의 변천을 보여주는 40점의 대표작이 나왔다.
전시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감동은 압도적인 크기에서 온다. 사진 두세 장을 이어붙인 ‘이미지 조작’ 덕분에 가능한 스케일의 미학이지만 워낙 정교해 감쪽같이 속는다. ‘파리, 몽파르나스’만 해도 가까이 가서 보면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동작, 커튼의 주름까지 선명하다. 이처럼 거시적이면서 미시적인 미학을 동시에 구현하는 점이 거스키 사진의 매력이다.
거스키는 1955년 구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에서 상업사진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그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사진을 통해 스펙터클한 감동을 줄 수 있을까’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성행한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갖는 거대한 크기에서 출구를 찾았다.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바넷 뉴만 등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격렬한 동작으로 붓을 휘두르듯이 그리거나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놓고 물감을 뿌리고 커다란 캔버스에 물감을 스며들게 해 아름다운 색채를 보여주는 등 방법은 달랐지만 벽처럼 큰 캔버스에 작품을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은 거대한 자연, 보이지 않는 신 등 거대한 것에서 두려움과 경외감을 느낀다.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이전에 볼 수 없던 거대한 캔버스 크기로 비슷한 감동을 느끼게 했다. 평론가들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에는 크기가 주는 숭고미가 있다고 평한다.
거스키는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처럼 사진 작품을 거대한 크기로 키웠다. 크기만 차용했을 뿐 아니라 이들을 오마주한 작품도 선보였다. 잭슨 폴록의 추상화가 전시된 공간을 찍은 ‘무제 Ⅵ’(1997)도 발표했지만, 그가 찍은 ‘도쿄 선물거래소’(1990) ‘시카고 선물거래소’(2009) 등은 폴록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사진의 배경을 의도적으로 검게 함으로써 거래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색색 옷이 폴록이 여기저기 흩뿌린 물감 자국처럼 보인다.
2015년 작 ‘회상’은 앙겔라 메르켈 등 전직 독일 총리들이 바넷 뉴먼의 작품 ‘인간, 영웅적이고 숭고한’을 바라보는 것처럼 편집함으로써 뉴만에 대한 헌사를 바쳤다. 튤립밭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여러 장 촬영한 뒤 이어 붙인 작품은 단색의 색 띠처럼 보여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멀리서 보면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허리를 구부려 일하는 사람의 동작까지 상세하다.
전시장에 놓인 거대한 작품들을 보노라면 감정이 고양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우혜수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부관장은 “이러한 감정은 단지 사진의 크기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다. 과거에 인류가 두려워했던 존재는 거대한 자연,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폭풍우 같은 날씨, 신과 같이 보이지 않는 대상이었다”며 “현대에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은 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급격한 변화, 자본주의, 권력,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글로벌리즘 등이다. 이는 종교를 대체할 강력한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고 말한다.
거스키는 현대인이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을 이미지 조작을 통해 거대한 크기에 담았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현대적인 공장, 증권거래소, 대형 건물 등 현대문명을 피사체로 택해 자본주의에 대한 두려움 자체를 시각화하는 데 성공했다. 대표작인 ‘99센트’(1999)와 ‘아마존’(2016)은 소비사회의 변화를 날카롭게 포착하는 등 기록 문화로서 가치도 잃지 않는다. ‘99센트’는 정확하게 수평으로 만든 선반 위에 가득 찬 상품을 강조하기 위해 배경의 색을 조정함으로써 대량소비사회의 스펙터클함을 극대화했다. 아마존의 물류센터를 찍은 ‘아마존’ 역시 소비사회의 단면을 보여주지만 이제는 물건이 종류에 따라 분류되는 게 아니라 주문 순서에 따라 분류되는 시대상의 변화를 담아낸다.
2007년 평양을 방문해 찍은 ‘평양’은 일사불란한 대규모 매스게임을 담아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권력의 공포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말년으로 갈수록 사진이 한 폭의 추상화처럼 표현된다. 독일 사진작가 거스키와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을 연결할 수 있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8월 14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